■ 그립습니다 - 어머니 정순숙(1934∼2023)
그랬구나, 어쩔 수 없지.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이다. 처음엔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상대방의 말에 공감해주고, 호응해주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순응과 체념 조의 그 말이 나를 맥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 말이 어느새 나도 좋아지게 되었다. ‘그랬구나,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읊조리다 보면 어떤 무례한 일도 용납이 될 때가 있다.
혼자 살았던 엄마는 내게 자주 전화했다. 그럴 때마다 “한 번 들를게”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화를 끊는 순간부터 나를 기다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막상 간다고 한 날이 되면 이런저런 연유로 “나중에 갈게”라며 엄마의 기다림을 가볍게 밀어냈다. 시댁이 있는 청주로 내려온 후로는 더 그랬다. 많이 서운했을 법도 한데 엄마는 늘 괜찮았다. “그랬구나, 어쩔 수 없지. 급할 거 없으니 나중에 천천히 와!” 낙천적이고 이해심 많은 엄마는 그런 식으로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나중에’라는 낱말이 주는 회피성 여유는 너무나 짧았고, 끝까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엄마한테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달려갔을 때 엄마는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참혹에 가까운 ‘나중에’라는 말이 싫어진 까닭도 그때부터다.
청주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명절 끝에 시어머니가 나를 불러 “너흰 용돈을 내놓기 어려우니 집안 대소사 궂은일은 네가 나서서 해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무척 당혹스러웠다. 벌이가 시원찮아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꼭 그렇게 말해야 했을까. 한 마디 한 마디 하도 섭섭해서 친정에 가자마자 푸념을 늘어놓았다. 엄마 속이 어떨지는 헤아리지도 않고. 엄마는 철딱서니 없는 나를 잠자코 다독였다. “그랬구나, 어쩔 수 없잖니? 그러려니 해야지.” 엄마는 내 역성을 들어주면서도 조용히 품고 넘기며 내가 조금씩 깊어지길 바랐다. 엄마가 걸어왔던 삶처럼, 엄마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세간살이처럼 세월의 풍화를 견디며 나만의 은은한 광택이 생기기를 바랐다.
그런 엄마가 이젠 내 곁에 없다는 상실감과 동시에 엄마를 혼자 외롭게 두었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조여 온다. 엄마가 쓰던 물건을 보니 엄마가 더 그립다. 외출할 때 힘이 되어준 지팡이와 보행차, 챙겨 먹어야 하는 약병, 앨범 속의 빛바랜 흑백사진들, 엄마의 애장품인 나무로 만든 묵주, 기도할 때 쓰던 초와 촛대와 성모상, 엄마의 체온을 기억하는 맞춤 옷가지 몇 벌, 쓰지 않고 넣어두었던 이불과 크고 작은 가구, 기억이 사라져가는 것을 막겠다고 가지고 놀았던 화투와 성실하게 바닥이 되어준 담요….
친정에 갈 때면 남편은 엄마를 위해 종종 화투판을 벌이곤 했다. 그럴 때면 엄마한테 유리한 패를 슬쩍 내주거나 이길 판도 져주곤 했다. 뻔히 속 보이는 짓인데도 엄마는 마냥 좋아했다. 묵주는 돌아가신 아빠가 한 알 한 알 나무를 깎아 철사로 연결하고 십자가에 예수상까지 조각해서 만들어준 선물이다. 엄마는 묵주를 들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성당에 가셨다. 미사 때마다 어떤 기도를 했을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뻔하다. 나보다 엄마를 더 많이 알고 있는 물건들이 엄마에 대한 뭉클한 이야기를 자꾸만 늘어놓는다. 물건마다 손때 묻은 엄마의 일상이, 엄마가 살아온 방식대로 집안 곳곳에 묻어있다. 언제나 나를 두둔해주던 엄마처럼!
미숙한 몇 개의 문장으로 엄마를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엄마와의 추억은 마치 뒷배를 봐 줄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마음을 든든하게 만든다.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후회가 적을까? 이러면 엄마는 또 “그랬구나, 어쩔 수 없지”라고 하실까? 오늘도 엄마는 내 결혼식 때 찍어두었던 영정사진 속에서 소담하게 미소 짓고 계시다.
딸 김현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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