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합니다 - ‘복둥이 누나’ 김재순
고드름이 에워싼 연지샘은 겨울에도 물이 넘쳤다. 샘 안에는 푸른 이끼가 자라고 그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청개구리는 ‘복둥이 누나’의 빨랫방망이 소리가 시끄러운 듯 이쪽에서 저쪽으로 느리게 헤엄쳐 갔다. 두 갈래로 딴 댕기머리 위로 흰 눈이 내리면 삐비꽃 같은 열아홉 순정은 빨래판 위에서 몰래 울었다.
영산강이 휘도는 마을은 평지가 적은 탓에 빈농이 많았다. 우리 집도 빈농을 피해 가지 못했다. 감나무 위로 보름달이 뜨면 우리는 보름달을 몰래 먹고 초가지붕 위 조롱박을 키우고 뒤뜰에 채송화를 키우고 봉숭아를 키웠다. 보릿고개가 시작되는 봄날, 누나는 울타리 밑에 앉아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며 홀쭉한 허기를 달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옆집 품앗이 일을 나가면 제비새끼 같은 어린 동생들의 앞가림은 누나의 몫이었다. 그해 여름 태풍 사라는 벼들을 사정없이 쓰러뜨리고 둑이 터진 영산강은 저지대의 논들을 모두 삼켰다. 마을은 누런 물바다 위에 한 척의 배처럼 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던 아버지는 풍년초 담배를 말아 피우셨다.
배부르면 놀고 배고프면 울던 어린것들을 앞에 두고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이웃 성민이네 집에서 품앗이로 일해놓은 사흘 치 삯을 보리쌀로 받아왔다. 복둥이 누나는 그날 보리밥에 풋고추랑 된장 그리고 신건지에 밥을 차려 주었다. 신물이 난 보리밥이었으나 시렁에 매달린 소쿠리가 비었으니 꽁보리밥인들 투정부릴 여유가 없었다. 가끔 꽁보리밥에 물을 말면 뚱뚱한 보리들이 알알이 흩어져 난민들처럼 밥그릇을 빙빙 돌았다. 땅거미가 슬그머니 겸상하자 찾아온 저녁, 그나마 동생들을 먼저 챙긴 누나는 신건지 국물로 배를 채우며 “배 안 부르지? 낼은 쑥 캐서 개떡 해줄게”라며 내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1960년 무덥던 그 여름, 시렁에 매달린 보리밥은 서글픈 몸짓으로 굳어가고 끼니와 끼니를 잇는 시간이 허기져 다가오면 소쿠리를 맴돌던 파리들은 한 식구가 되어 뚜껑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어린 마음에도 궁금했던 것은, 왜 우리 집은 보리밥만 먹을까. 왜 쌀은 보이지 않을까. 옆집 성희네는 맨날 하얀 쌀밥을 먹는데 어째서 우리집은 시커먼 꽁보리밥만 먹어야 할까. 철없던 생각은 삐비꽃 옆에서 혼자 울었다.
태풍이 가고 은빛 물결이 나불거리는 가을, 아버지는 영산강에 그물을 던졌다. 목포 바다에서 올라온 웅어들은 아버지의 가난한 그물에 걸려 찰랑찰랑 햇발 튀며 올라왔다. 크고 작은 웅어들이 마치 오선지에 매달린 음표처럼 파닥거리자, 눈치 빠른 강바람이 얼른 삿대를 저으면 흥에 겨운 아버지는 저절로 뱃노래가 되었다. 아버지의 뱃노래가 흥겨운 날, “복둥아, 오늘 웅어 많이 잡았다. 이것 시래기랑 호박 넣고 지져서 애기들 줘라.” 누나는 아버지가 잡아 온 물고기 전문 요리사였다. 맵지 않고 간간하게 어린 동생들의 입맛에 딱 맞게 만들어 내는 솜씨는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누나는 항상 동생들을 먼저 챙겨 준 다음 밥을 먹었다. 밥이 부족할 때는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고구마를 구우며 송춘희의 노래 ‘영산강 처녀’를 구성지게 불렀다.
그 유년의 기억이 아랫목처럼 찾아온 오늘, 나는 우리 복둥이 누나의 주름진 얼굴을 본다. 그해 겨울, 누나는 보따리 하나 들고 동강 어느 총각을 따라 먼 길을 떠났다. 나는 울며 연지샘까지 따라갔으나 누나는 마을 뒤 꽁바탕 위로 뜬 보름달 하나 안겨 주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시집을 갔다. 빈농의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동강 총각을 따라갔던 우리 복둥이 누나, 그 누나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오늘, 내 손을 잡는다. 얼굴이 복스럽게 생겼다 하여 아버지가 “복둥이”라고 불렀던 우리 복둥이 누님, 나를 바라보는 85세의 눈가에 채송화랑 봉숭아가 피었다 진다.
동생 김재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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