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의사는 거사를 위해 1922년 중국 상하이를 떠나기 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뒷짐을 지고 사진을 찍은 이유는 나라를 뺏기고 아무것도 못 하는 손이 부끄러워서였다고 한다.  자료사진
김상옥 의사는 거사를 위해 1922년 중국 상하이를 떠나기 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뒷짐을 지고 사진을 찍은 이유는 나라를 뺏기고 아무것도 못 하는 손이 부끄러워서였다고 한다. 자료사진


■ 역사 속의 This week

‘쾅∼’ 1923년 1월 12일 밤 8시쯤,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날아들었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검거와 고문의 상징이었다. 경찰서 측은 피해가 크지 않았다며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안으로는 발칵 뒤집혀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범인으로 지목된 이는 3년 전 수배 대상자에 올랐던 김상옥이었다.

1889년 지금의 종로 효제동에서 태어난 김상옥은 여덟 살 때부터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철물점을 운영하며 성공한 청년사업가가 된 그는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후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고, 모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행·배포했다가 체포돼 40일간 고문을 당했다. 이후 암살단을 조직, 일제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 등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1920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2년 12월 권총과 폭탄 등을 가지고 경성으로 잠입했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조선의 독립 의지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삼판통(현 후암동) 여동생 집에 숨어 다음 목표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암살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사건 닷새 뒤인 17일 은신처가 드러나 일경 20여 명이 들이닥쳤다. 쌍권총을 쏘며 포위망을 뚫고 남산으로 도망친 그는 맨발로 눈밭 위를 달리고 또 달렸다.

그가 신출귀몰하며 추적을 따돌리자 일제는 병력을 총동원했다. 효제동 동지 집으로 몸을 피한 것을 알아냈고, 22일 군경 1000여 명이 일대를 겹겹이 에워쌌다. 김상옥은 단신으로 맞서 인근 지붕을 넘나들며 권총 두 자루로 3시간 동안 벌인 치열한 총격전에서 일경 16명을 쓰러뜨렸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항일 시가전을 펼친 그는 탄환이 바닥나자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마지막 한 발을 자신의 몸에 겨눠 3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가족이 시신을 거둘 때 몸에는 11발의 총상이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두 손에 권총을 꼭 쥐고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을 펴지 않았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중국을 떠나면서 동지들과 작별할 때 김상옥 의사가 남긴 말이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부는 1992년 1월부터 매달 발표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김 의사를 최초로 선정해 그의 헌신적인 삶과 독립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리도록 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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