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 하락에 힘입어 외국인 관광객들이 폭증하고 있는 일본에서 관광업계를 중심으로 ‘이중가격제’ 얘기가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외국인 관광객과 일본인 거주자에게 차별적인 가격을 매기자는 건데, 관광시설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내국인보다 더 높은 비용을 내게 하자는 주장입니다. 아직은 ‘아이디어 차원’이지만, 이런 주장이 나오기까지 상황을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입니다.

20여 년 전쯤 일본을 여행하면서 ‘도대체 일본인들은 이렇게 비싼 물가를 어떻게 견디고 사냐’며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일본이 관광객 유치의 가장 큰 걸림돌로 지목했던 게 ‘높은 물가’였습니다. 그때 엔화는 지금의 두 배쯤 가치를 지닌 강력한 통화였습니다.

20년 넘게 디플레이션이 계속되고 엔화가치까지 곤두박질한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물가지수로 인정받는 이코노미스트지의 빅맥 지수 최신 집계에 따르면, 일본은 세계 44위로 한국, 중국, 태국 등보다 낮습니다. 일본에서 450엔(4091원)에 팔리는 빅맥이, 미국에서는 1.7배가 넘는 5.58달러(7365원)입니다. 편의점이나 마트의 콜라 가격은 우리의 60%쯤입니다. 이제 일본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물가가 싼 나라’가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중가격제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겁니다. 일본 관광업계는 부유한 외국인 관광객과 일본 거주자의 교통요금이나 관광시설 이용 지출비용의 차이를 두는 게 오히려 건강하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나가야마 히스노리 일본 료칸협회 부회장은 “싱가포르에서는 테마파크나 슈퍼마켓, 레스토랑 등에서 거주자에게 할인 혜택을 주는 방법으로 이중가격제를 운영한다”며 “외국인 관광객들은 돈을 더 내는 대신 패스트트랙이나 정중한 지원 등의 ‘좋은 불공정’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의 JR그룹이 지난해 10월 외국인 관광객에게 판매하는 JR철도패스 가격을 대폭 인상한 것도 이중가격제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JR패스 7일권은 2만9650엔에서 5만 엔으로 69%나 올랐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적용해주던 할인율을 크게 낮춘 건데 앞으로 JR패스 가격이 현지요금과 똑같아지거나 오히려 더 비싸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중가격제는 경제적 격차 해소를 위한 긍정적 제도일까요, 아니면 외국인을 부당하게 차별하는 불공정한 정책일까요.
박경일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