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준의 Deep Read - 北, 대남정책의 변화
김정은 정권, ‘적대적 M&A’ 아닌 ‘적대적 국가관계’ 적용… 대남공작 창구 전반 이상 조짐
경제난·안보 불안 따른 두려움 큰 듯… 韓, 민족관계 넘어 국제법 토대 위 대북정책 세워야
최근 북의 대남 선동과 남파간첩 지령 매체인 평양방송의 송출이 중단됐고, ‘우리민족끼리’ 같은 대남 선전 매체들의 홈페이지가 삭제되는가 하면 대남공작을 총괄해 온 통일전선부의 대폭 개편이 거론되는 등 새해 벽두부터 북한 대남공작 창구 전반의 이상 조짐도 포착되고 있다.
◇대남 메시지에 담긴 것
최근 북한 수뇌부의 연이은 대남 위협은 중국 정부가 대만 총통 선거에서 친중 후보 지원을 위한 여론공작에 나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4월 총선을 겨냥한 선거공작의 성격이 짙다. 북한이 선거 때마다 정치권을 ‘전쟁세력’과 ‘평화세력’으로 양분해 한국 내의 이른바 ‘우호세력’을 비호하는 여론공작을 전개해 온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연이은 호전적 구호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한국을 공식 국호로 칭하고 남북관계를 국가관계로 규정한 데 이어 대남 파괴공작의 선봉인 통일전선부를 개편하고 선전 매체들까지 폐쇄하는 움직임에 돌입한 것은 선거공작과 별개의 새로운 움직임을 시사한다. 만일 대남 무력행사와 전쟁이 북한의 진정한 의도라면 그 선봉대가 돼야 할 통일전선부와 선전 매체들의 활동은 오히려 더욱 강화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의 이런 움직임이 낡은 대남공작 체계를 쇄신하기 위한 작업인지, 또는 통일전선 전략을 통한 적화통일의 포기를 정당화하려는 고의적 호전성 표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북한의 진의가 무엇이건, 최근 북한의 요란한 대남 허장성세는 핵무장에도 불구하고 가중되는 안보불안과 경제난에 대한 좌절과 두려움, 그리고 북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국내 친북세력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투 코리아’ 정책
최근 북한은 남북 간 민족관계를 ‘적대적 국가관계’로 전환한다는 메시지를 반복해 보내고 있다. 민족관계를 국가관계로 전환한다는 ‘투 코리아(Two Korea)’ 정책이다. 수식어로 붙은 ‘적대적’이라는 표현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북한의 대남정책은 분단 이래 시종일관 ‘적대적 M&A’ 정책이었고, 북한은 그런 적대적 정책을 바꾼 적이 없었다.
분단 이래 남북한은 공히 상대 지역을 수복 대상 지역으로 여겼고, 이 때문에 남북관계를 국가관계도 아니고 국제법이 적용되지도 않는 ‘특수관계’로 관리해 왔다. 북한은 1973년 이래 50년간 고려연방제 방식의 흡수통일 정책을 고수했고, 한국도 나름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흡수통일을 소망해 왔다. 남북 양측이 ‘평화통일’이라는 명목으로 추구해 온 이러한 흡수통일 정책으로 인해 남북 사이의 불신과 의심은 계속됐고 평화통일은 요원한 과제가 됐다.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 방안이란 남북이 각기 현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단일 연방국으로 통합하자는 것인데, 여기엔 북한이 남한 내 친북세력과 결속해 압도적 다수로 연방정부와 연방의회를 지배한다는 계산이 깔렸었다. 그러던 북한이 돌연 지난해 7월부터 한국을 ‘대한민국’이라 칭하고 남북관계를 ‘국가관계’로 규정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흡수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자각과 더불어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의 변화, 도전과 기회
북한의 이 같은 변화는 무력통일과 연방제 통일정책의 종식을 뜻하는 긍정적 변화를 수반할 수도 있고, 단지 유엔 제재 해제를 위한 전술적·기만적 책략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우리 자신의 대북정책에 관한 하나의 중요한 시사점을 제기한다. 북한의 고려연방제 흡수통일 방안이 비현실적 환상이었듯, 한국이 추구해 온 평화통일 정책도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구상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평화통일을 추구해 왔으나, 합의를 통한 분단국 평화통일이 성공한 사례는 인류 역사상 없다. 유일한 선례였던 1990년 남예멘과 북예멘의 통일은 불과 수년 만에 내전·무력통일·반란으로 이어지고 아직도 내전이 계속 중이어서, 대표적 실패 사례로 남았다. 그렇다고 한국이 북한의 의사에 반해 통일을 강제할 수단도 없다. 핵무장 북한이 아무리 심각한 경제난에 처한들 공산독재를 포기하고 자진 투항해 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설사 김정은 체제가 무너진들 다른 권력자가 곧 그를 대체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통일을 막연히 기다리며 남북관계를 ‘특수관계’로 취급해 온 기존 정책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차제에 남북관계를 ‘국가관계’로 재정립해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협력하고 경쟁하는 것이 남북관계의 안정과 발전에 효과적일 수 있다. 남북은 1991년 유엔 동시 가입을 통해 국제법상 ‘사실상의 상호 국가 승인’을 행한 선례도 있다.
◇동서독 관계의 교훈
분단시대 동서독은 양국 의회의 비준을 얻어 국제법상의 조약으로 채택된 ‘동서독 기본조약(1972)’에서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을 공식 국호로 상호 인정하고 ‘상대방의 독립과 자주성을 존중’하기로 합의했다. 통치 지역도 ‘각자의 영토 내’로 제한해 ‘경계선 불가침’을 규정했고, 양국 수도에 ‘상주대표부 교환 설치’도 시행했다. 상대방을 사실상의 주권국가로 인정한 이 조약은 1990년 동서독 통일에 어떤 장애도 되지 않았다.
당시 서독의 헌법에 해당하는 ‘서독 기본법(1949)’ 제23조는 한국 헌법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독일 영토 전체를 서독 영토로 간주했으나, 서독 기본법이 실제로 적용되는 대상을 ‘서독 연방을 구성하는 12개 주’로 한정했고 동독 지역에 대해서는 ‘그 지역들의 서독 연방 가입과 동시에 적용된다’고 규정함으로써 적용을 유보했다.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후 통일에 이르기까지 18년간 동서독 사이의 합의는 국가 간 협정 형식으로 체결되고 비준되고 이행됐다. 대동독 경제 지원도 민족 간 무상원조가 아닌 국가 간 차관협정의 형식으로 처리됐다. 차관 제공의 대가로 서독 방송 청취 허용, 상호방문 확대, 동독 정치범 망명 허용 등 다양한 협정상 의무가 부과됐는데, 동서독 사이의 이런 제도화된 거래 관행은 훗날 독일 통일 실현의 불가결한 토대가 됐다.
세종연구소 이사장, 전 외교부 북핵대사
■ 용어설명
‘투 코리아’ 정책이란 남과 북이 힘에 의한 흡수통일을 추진하지 않고 각자 독립적인 국가로 공존을 꾀하는 정책. 대외정책도 별개의 국가로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규정.
‘고려연방제’는 남북에 각자의 정부를 그대로 둔 채 고려연방공화국을 세워 사실상의 ‘일국양제’를 만들자는 통일 방안. 북한이 남한 내 친북세력과 결합해 연방정부·의회를 장악하려는 속셈.
■ 세줄 요약
대남 메시지에 담긴 것 : 북한 정권은 최근 남북관계를 민족관계가 아닌 ‘적대적 국가관계’로 규정. 대남공작 창구의 전반적인 이상 조짐도 포착돼. 이는 남북을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설정하겠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
‘투 코리아’ 정책 : 이는 그간의 ‘적대적 M&A’, 즉 흡수통일론이 아니라 ‘투 코리아’ 정책으로 선회한 것을 말해줌. 근저에는 경제난과 안보불안에 대한 두려움,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이 깔려 있어.
동서독 관계의 교훈 : 북의 대남정책 변화는 한국에 도전이자 기회임. 한국도 차제에 동서독 관계를 모범 삼아, 남북관계를 ‘국가관계’로 재정립해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협력하고 경쟁하는 대북정책 수립을 검토할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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