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국가인 미얀마의 가장 유명한 성지이자 정신적 중심인 슈웨다곤 파고다로 향하는 길.  게티이미지뱅크
불교 국가인 미얀마의 가장 유명한 성지이자 정신적 중심인 슈웨다곤 파고다로 향하는 길. 게티이미지뱅크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33) 미얀마 양곤

1920년 英 식민지배 파업 후
농민봉기·학생투쟁 등 잇따라

1962년 군부 맞선 ‘학생 봉기’
이후 군중시위·유혈진압 반복
작가 팃사니 “죽음에 길든 곳”

적+탈출 의미 합쳐진 ‘양곤’
투쟁 종식·평화로운 일상 염원


“세상에는 전생의 공덕으로 돈을 가진 자도 있고, 지혜를 얻은 자도 있고, 근육을 가진 자도 있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약한 자를 억압하고 약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대 미얀마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팃사니의 ‘나비’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미얀마는 1962년 쿠데타 이래 지금까지 군사독재로 고통받고 있다. 국가 폭력과 학살, 경제적 억압과 착취, 분쟁과 내전 등이 이어져 민중들 삶은 도탄에 빠져 있다. 2023년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1381달러에 불과하다.

제목의 나비는 1988년 민주화 전쟁 때 희생당한 시민들 약 7000명의 영혼을 상징한다. 자유를 갈망하고 평화를 누리려 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노력은 번번이 군부의 폭력과 탄압에 좌절당해 왔다. 억압, 투쟁, 쿠데타, 학살로 이어지는 악순환은 미얀마 현대사를 특징짓는다. 팃사니는 미얀마를 억압에 익숙하고 죽음에 길든 사회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팔다리와 머리)뿐만 아니라 마음과 생각까지 보이지 않는 줄들이 ‘나’를 조종하고 있다면? 이 무섭고 두려운 상황이 꿈이 아닐 수도 있다.”

살아 있음이 고통이 되는 삶이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은 미칠 수밖에 없다. 단편 ‘욕 값’엔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회에서 짜증을 견디며 사는 이들을 위한 독특한 직업이 등장한다. 욕받이,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사람들 욕을 들어주고 돈을 받는 일이다. 작가는 말한다. “아, 이 일이 세상살이에 아주 적합한 일이구나.”

양곤은 미얀마 민주화의 성지다. 독재에 맞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저항과 투쟁의 정신이 이 도시의 유전자를 이룬다. 1988년 민주화 전쟁, 2007년 사프란 혁명, 2020년 선거 혁명 등에서 양곤은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정치 운동과 사회 조직, 시위와 봉기의 중심이었다. 그 뿌리엔 영국 식민 지배의 착취와 차별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선조들의 유산이 담겨 있다.

미얀마 양곤 응가타지 불교사원에 있는 6.2m 높이의 불상.  게티이미지뱅크
미얀마 양곤 응가타지 불교사원에 있는 6.2m 높이의 불상. 게티이미지뱅크


양곤이 미얀마 역사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1세기 초다. 당시 미얀마 지역은 버마족 국가인 버강이 지배했다. 미얀마 상부 차우세 평원에서 일어선 버강은 미얀마 하부의 여러 몬족 국가들을 정복했다. 버강은 몬족의 세련된 불교문화(상좌부불교)를 받아들여서 국가 통합 이념으로 삼은 후 미얀마 전역에 퍼뜨렸다. 미얀마가 불교 국가가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양곤의 중심엔 약 2500년 전 지어졌다는 슈웨다곤과 술레 파고다가 있었다.

14세기 중엽, 몬족은 바고 왕국을 세워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았다. 바고 왕국 전성기를 일군 신소부 여왕은 슈웨다곤 파고다를 40m 높이로 증축한 후, 그 옆에 궁궐을 지어서 거주했다. 이 일을 계기로 양곤은 미얀마에서 가장 유명한 순례지이자 정신적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민주화 시위 때마다 이 탑 앞이 투쟁 중심지가 된 이유이다.

1755년 버마족 꼰바웅 왕국이 다시 양곤을 점령한 후, 이때부터 도시 이름을 양곤으로 칭했다. 이후, 에야와디강과 인도양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서 양곤은 발전을 거듭했다. 동남아에 진출한 영국의 눈에 양곤은 미얀마 내륙의 풍부한 쌀과 티크를 실어 나르고, 중국 윈난(雲南)으로 진출하기 위한 입구로 보였다.

19세기 들어 영국은 1824년, 1852년, 1885년 세 차례 전쟁을 통해 미얀마를 점령해 식민지로 삼았다. 1852년 양곤은 영어식 이름인 랑군으로 불리며 영국령 미얀마 수도가 되었다. 식민 정부는 미얀마 남부 삼각주에 대규모 쌀 경작지를 조성하는 한편, 양곤에 유럽 도시를 본떠 도로, 철도, 병원, 대학, 건물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해 식민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다. 양곤이 아름다운 ‘동양의 정원 도시’로 알려진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양곤은 전형적인 식민지형 국제도시일 뿐이었다. 1916년 인도 시인 타고르는 양곤을 방문한 후 말했다. “양곤은 국가라는 토양으로부터 난 나무처럼 성장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라는 조류 위의 거품처럼 떠도는 듯하다. 나는 양곤을 둘러봤지만, 그 속에는 버마라고 여길 만한 것이 없었다. 그 도시는 추상화다.” 타고르의 눈에 양곤은 뿌리 잃은 식민 도시, 미얀마인을 먹이 삼아 영국인, 인도인, 중국인이 몰려들어 탐욕을 향해 질주하는 착취 도시였다. 1824년 9000명에 불과했던 양곤 인구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엔 50만 명에 이르렀다. 절반 이상은 인도인이었고, 3분의 1만이 버마인이었다.

대다수 버마인은 변변치 않은 직업을 전전하며 영국인, 인도인, 중국인들 손에 무참하게 착취당했다. 모든 어린아이가 사원에 들어가 공부해야 하는 전통 덕분에 19세기 말 미얀마는 아시아에서 문해율이 가장 높고 범죄율이 가장 낮은 나라였다. 하지만 식민 지배를 거치는 동안 버마인은 끝없이 수탈당하면서 최하층 3등 시민으로 전락했다. 저항은 필연이었다.

‘여인들의 운명’(1937)에서 마하세는 외쳤다. “영국 놈이 잘못해서 일이 벌어진들 무슨 소용 있어? 미얀마인은 정당하지 않으면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 그들은 깨달아야 해.” 1910년대 이후, 근대 교육을 받은 신지식인들이 일어나 양곤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1936년, 1938년 영국 통치에 반대하는 전국 파업이 양곤에서 시작됐다. 1930년엔 전국적인 농민 봉기가 있었다. 대공황에 따른 쌀값 폭락에서 시작된 봉기는 식민 지배의 상징인 건물과 철도를 파괴하고, 식민 관료와 변절자 등을 공격했다.

아웅산, 마웅 누 등 양곤대 학생들은 굴욕적 식민 지배를 청산하고자 ‘우리 버마 연맹’(1935)을 조직해 반제국주의 혁명 투쟁에 나선다. 단편 ‘눈물의 노래’에서 테인 페민은 선언한다. “탐욕으로 가득한 부르주아 제국주의 시대에, 파렴치하고 몰인정한 이 약육강식 시대에 달콤한 비둘기 울음만 감상하고 있을 순 없다.” 제국주의의 폭탄 소리, 총소리에 맞서는 저항의 외침이었다.

미얀마 양곤의 잉야 호수에 위치한 카라웨익 궁전.   게티이미지뱅크
미얀마 양곤의 잉야 호수에 위치한 카라웨익 궁전. 게티이미지뱅크


1942년 일본이 쳐들어와 양곤을 점령했다. 일제강점기 미얀마인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사회 기반시설이 파괴되고, 물가 폭등으로 생계유지가 힘들어진 와중에 콰이강의 다리가 상징하듯 가혹한 동원 수탈 체제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아웅산, 터킨 소 등은 무장조직을 건설해 일제 타도에 나섰다. 1945년 영국이 양곤을 탈환한 후, 재식민화 정책을 추구하자 미얀마 민중은 강하게 반발했다. 1948년 투쟁 끝에 미얀마가 독립하면서 양곤은 그 수도가 되었다.

독립 직후, 미얀마는 공산주의자들의 무장 투쟁, 샨족, 카친족, 로힝야족 등 소수민족들의 자치권 투쟁 등이 맞물리면서 혼란에 휩싸였다. 불교 사회주의에 기반해 제국주의를 청산하려 했던 정부 정책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분열과 혼란은 군부 개입 명분을 주었다. 1962년 네 윈이 이끄는 군부는 연방 유지, 법과 질서 회복 등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키고, 피의 철권통치에 나섰다.

1962년 양곤대 학생들의 봉기를 기점으로 이에 반발해 군부 통치를 종식하려는 민주화 투쟁이 시작됐다. 이후 1974년, 1988년, 2007년, 2021년 등 대규모 시위와 유혈 진압이 반복됐다. 1988년 네 윈을 무찌르고, 아웅산 수지를 중심으로 민주화가 이뤄지는 듯했으나, 군부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2006년 양곤은 식민 통치 유산인 랑군이라는 이름을 벗고, 양곤이라는 버마식 이름을 되찾았다.

당연히 이름이 문제는 아니다. 팃사니는 묻는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게 의미가 있긴 한 것일까? 아니면 자유라는 것이 의미가 있긴 한 것일까?” 양곤은 ‘적’을 뜻하는 버마어 단어 얀(yan)과 ‘탈출’을 뜻하는 쿤(koun)이 합쳐진 말이다. 이는 투쟁의 종언을 뜻한다. 식민 지배에 이어 군사독재의 억압과 싸워온 양곤 시민들은 투쟁을 끝맺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기를 오늘도 염원하고 있다.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1988년 민주화 전쟁

1988년 민주화 전쟁은 미얀마 현대사의 분기점을 이룬다. 1988년 8월 8일에 양곤대 학생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기에 ‘8888항쟁’이라고도 한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 시위에서 시작했으나, 군부 진압으로 시민, 대학생, 승려 등 수천 명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1962년 이래 미얀마를 통치해온 네 윈 장군이 물러나고, 1990년 실시된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연맹이 승리해 정권을 얻었다. 그러나 군부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수지를 가택 연금한 후 아직도 피의 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