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푸크너 하버드대 교수는 문화의 혼합과 순환의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K-팝을 꼽았다. 푸크너 교수는 BTS 뷔(V)가 ‘싱귤래리티’ 무대에서 활용한 하얀 가면에 동아시아 연극과 공연 전통의 깊은 역사가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해당 뮤직비디오의 스틸이미지.
마틴 푸크너 하버드대 교수는 문화의 혼합과 순환의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K-팝을 꼽았다. 푸크너 교수는 BTS 뷔(V)가 ‘싱귤래리티’ 무대에서 활용한 하얀 가면에 동아시아 연극과 공연 전통의 깊은 역사가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해당 뮤직비디오의 스틸이미지.


■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마틴 푸크너 지음│허진 옮김│어크로스

흑인 인권운동 근거 된 솔로몬
서양 영향 받은 日 우키요에 등
순수한 문화 아닌 혼합성 강조

싸이·BTS 등 한류 열풍 이유
‘뒤섞인 스타일’ 때문이라 분석


인간의 지혜를 담는 그릇, 곧 ‘문화’다. 우수하고 찬란한 문명을 이끈 문화는 어떤 형태, 어느 정도 크기의 그릇일까. 이를 만들어내는 동력은 무엇일까. 마틴 푸크너 하버드대 교수의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는 문화에서 ‘순수함’은 결코 훌륭한 동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푸크너 교수의 신간은 문화가 집단, 국가, 종교, 또는 인종에 의해 소유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강력한 비난이다. 책에 따르면, 그것은 때로, 아니 자주, 타 문화에서 훔쳐오고, 대립하고, 부정되고, 깨지고, 다시 접합하며 더 크고 아름다운, 그리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재탄생한다.

저자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전작 ‘글이 만든 세계’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부터 J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까지 인류사에 있어서 ‘위대한 텍스트’의 가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바 있다. 광범위한 지식을 매끄럽게 엮는 솜씨가 여전한데, 이번에는 고대 동굴 벽화에서 시작해, 지금 가장 뜨거운 한류 현상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발명과 발신, 그 확대와 재생산에 대해 논한다.

책은 기원전 3만5000년 프랑스 남부 쇼베동굴 벽화를 인류 최초의 예술품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리스 서사시를 재창조해 역사의 주체가 된 로마 제국의 문화 수용과 차용, 활용을 짚으며 수십 세기를 횡단하는 인류 문화 오디세이를 시작한다. 그 여정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건 혼합과 순환. 이를 잘 적용한 문화가 오래 살아남아, 더욱 풍요로워졌다는 것이다. 책은 이 특성은 거의 ‘규칙’에 가깝다면서 비교문학 연구자로서 직접 꼽은 인류의 기념비적인 순간 15가지를 통해 입증한다. 그렇게 책은 “시간과 장소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서로 놀라울 정도로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끼치는 이야기”가 되고, “문화의 교류와 차용이 얼마나 아름답고 필연적인지”(에이미 추아 미국 예일대 교수)를 설파한다.

아랍 시인 바스라의 알 하리리의 1237년 저작 속 삽화 ‘도서관과 제자들’은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를 연상시킨다. 어크로스 제공
아랍 시인 바스라의 알 하리리의 1237년 저작 속 삽화 ‘도서관과 제자들’은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를 연상시킨다. 어크로스 제공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정복한 그리스의 문학을 200% 활용했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자신들의 위업을 과시하기 위해, 즉 존재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는 정복당했어도, 그 문화는 더욱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의 원형이 깃든 ‘그리스·로마’ 신화가 인류 공통의 자산으로, 위대한 텍스트로 남은 것은 그 덕이다. 책은 문학·종교·예술이 창시자의 의도에 머물지 않고, 만든 이의 의도를 벗어나 점점 더 풍성한 의미를 담은 사례에도 주목한다. 예컨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솔로몬 왕은 흑인 인권 운동과도 관계가 있다. 14세기 에티오피아 서사시 ‘케브라 나가스트’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왕조는 솔로몬 왕을 계승한 유대 왕조의 직계 후손이다. 이때 솔로몬 왕은 에티오피아 왕조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역할을 했으나, 훗날 이 서사시는 흑인들의 역사를 상징하는 텍스트로 재해석돼 블랙팬서 등의 흑인 인권 운동에도 영향을 끼친다.

저자는 서구에 불었던 일본 열풍인 ‘자포니즘’은 독창성과 고유성에 대한 신화 파괴로서 바라본다.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 하면 떠오르는 다색판화 우키요에를 보자. 호쿠사이의 그 유명한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를 비롯해 대부분의 우키요에는 서양 기법을 도입해 발달했고, 화풍 역시 당시 일본 미술에서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키는 힘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 전환점에서 발생하는 것은 늘, 항상 다른 문화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책은 인도에서 불교 경전을 구하기 위해 16년간 여행한 중국 현장법사, 다신교 국가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신교 혁명, 서양 예술에 파괴적 영향을 준 중국 경극 등 단절과 복원, 권력 투쟁과 무모한 여정을 매개로 한 문화 성취의 역사를 톺아보며, 결국 문화란 과거의 작은 조각들이 회수돼 새롭고 놀라운 의미를 만드는 “거대한 재활용 프로젝트”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를 둘러싼 크고 작은 갈등과 혼란은, 인류가 종종 “문화가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912년 발굴된 기원전 14세기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   어크로스 제공
1912년 발굴된 기원전 14세기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 어크로스 제공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흥미로울 대목은 한류를 언급한 마지막 장, 에필로그일 것이다. 저자는 1990년대 후반 인터넷과 함께 등장한 한류가 지금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성장한 가장 큰 이유를, 한류가 처음부터 “뒤섞인 스타일”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인기로 본격화한 K-팝 현상은 방탄소년단(BTS)을 통해 절정기를 맞는다. 저자는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와 BTS V의 가면 퍼포먼스를 소개하고, K-팝이 “문화사가 순환과 혼합을 향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좋은 사례”라고 강조한다. 인류 문명을 이끈 문화 발전의 규칙, 즉 혼합성과 순환의 원리를 가장 잘 담고 있으며, 동시에 그 파급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최첨단’ 문화라는 것. 틱톡이 등장하기 이전 이미 전 세계에 패러디 영상을 유행시킨 ‘강남스타일’은 지금의 ‘챌린지’와 같은 문화적 ‘공유’의 시초다. 또 하얀 가면을 적극 활용한 V의 무대는 동아시아 연극과 공연 전통의 깊은 역사가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감각의 시각 예술로 재탄생하는 장면이다.

프랑스 남부 동굴에서 문화사를 시작하는 책이, K-팝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책의 영어 원제에 ‘동굴에서 K-팝까지’(From cave to K-pop)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저명한 해외 학자로부터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는 차원이 아니다. 저자는 줄곧 ‘자산’과 ‘소유권’의 개념으로는 문화의 실제 작동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해 왔다. 따라서 책은 우리의 것, 우리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K-팝으로부터 오히려 거리를 두게 한다. 한류를 보다 광범위한 시각으로, 즉 인류 문화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 이때 K-팝은 ‘문화의 이동’ 과정이자, 그 중심을 점한 실체로서 새롭게 다가온다.

저자의 말대로 문화가 “끊임없이 변신하고 접합하며 인류의 지혜를 미래로 전하는 원동력”이라면, K-팝은 지금 인류가 맞이한 ‘최신’의 지혜이고, 몇 번이고 진화할 “놀라운 이야기” 중 하나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종(種), 문화를 만드는 ‘창조적 인간’이다. 472쪽, 2만2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박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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