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내가 97세 아버지(왼쪽)를 모시고 전북 정읍 구절초 축제에 갔을 때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작년 10월 내가 97세 아버지(왼쪽)를 모시고 전북 정읍 구절초 축제에 갔을 때 함께 사진을 찍었다.


■ 고맙습니다 - 98세 아버지 최세태

대처(서울) 생활 40여 년을 청산하고 귀향한 지 5년 만인 엊그제. 인사동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귀향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생활글’(수필이 아님) 80여 편을 모처럼 모아 책을 펴냈다. 인생 도반(道伴)이라고 할, 강호(江湖)의 제제다사한 선배와 지인을 비롯한 친구 후배 등 60여 명을 좁은 식당에 초대해 이루어진 그날 모임의 콘셉트는 ‘막걸리 한잔’.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지난 2008년 대학로에서 108명을 초대했던 출판기념회에 이어 16년 만에 이뤄진 만큼, 호스트인 나의 인사말이 길었다. 원고를 준비하려다 어색해 즉석에서 소감을 밝히는데, 울컥한 그 무엇이 있었다. 소설가나 시인, 수필가는 아니지만, 생활칼럼니스트나 생활글 작가를 자처하는 만큼 ‘글쟁이’라 할 수 있겠는데(그동안 8권의 책도 펴냈으므로), 알량한 글쟁이가 된 단초(실마리)가 100%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하는 대목에서였다.

나의 고향은 임실 오수. 면 소재지에서 4㎞쯤 떨어진 시골이다. ‘국졸(초졸)’ 출신 아버지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4남 3녀의 총생을 기르고 가르치느라 얼마나 고생이 자심하셨을까. 보지 않았대도 비디오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7형제를 임실 오수에서 전주로 유학을 시켰다. 아들 넷 가운데 책(독서)을 유난히 뻗치던 내가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10리를 걸어야 하는 오수장에 나를 데려가 면 소재지에 처음 생긴 서점에서 사고 싶은 책을 맘껏 고르라고 했다. 지금도 기억이 뚜렷한데, 그때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 5권, 역사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 5권, 김교식의 ‘광복 20년’ 5권을 사주셨다. 무엇을 안다고 ‘광복 20년’을 골랐을까? 참 모를 일이다. 아무튼 어린 내가 책 15권을 묶어 10리길을 낑낑대며 혼자 힘으로 집에 가져왔다. 동네 사람들이 들어주겠다는 것도 거절하니 ‘참 이상한 녀석’이라고 했다. 그때보다 기분 좋았던 때는, 큰아들을 낳았을 때 빼고는 이제껏 없었던 것 같다.

지난 2월 27일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연 ‘막걸리 한잔’ 출판기념회 모습.
지난 2월 27일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연 ‘막걸리 한잔’ 출판기념회 모습.


당시만 해도 집에는 읽을 책이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500쪽이 넘는 ‘이조 오백년 야사’. 몇 번을 읽었던지 지금까지 조선의 야사(野史)는 훤하다. 그러고는 월간 ‘새농민’뿐이었다. 그러니 글에, 책에 얼마나 목이 말랐을 것인가. 그날 생각지도 않은 아버지의 ‘몽땅’ 책 선물이 나를 지금껏 ‘책 귀신’으로 만든 게 아니었을까? 이후 닥치는 대로 활자 중독자가 된 듯 이런저런 인문학 책들을 읽어재꼈다. 주로 문학책을 읽으며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 어쨌든 ‘좋은 책’ 감별사가 됐고, 거기에 몰입했다. 그 결과였을까? 기자도 됐고, 대한민국 홍보맨도 됐으며, 오늘날 생활글 작가가 돼 이런 작지만 소문난 출판기념회도 갖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하며, 이 일화를 떠올리니 좌중이 숙연하고, 나도 졸지에 목이 메었다. 그렇다. 일찍이 ‘문학가’라며 나를 인정해준 아버지 덕분에 오늘날 내가 있는 것은 불문가지. 목이 메는 까닭은 또 있다. 1927년생 우리 나이 98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5년. 이제 천수(天壽)를 다 누리셨는지 올해 들어 전립선 비대증이 악화돼 90년 동안 살았던 고향집을 떠나 요양원 입주를 앞두고 계시니 생각만 해도 울적해지는데, 이런 일화가 하필이면 출판 잔치에 떠올랐으니 어찌 울컥하지 않았겠는가. 문학가는 제 아들 이름을 항렬(行列)에 따라 짓지 않아도 된다며 손자의 한글 이름도 용납해준 우리 아버지, 어찌 이 하해 같은 은총을 잊어버리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들 최영록(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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