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Leadership - 지난해 4분기 글로벌 판매 1위 비야디 왕촨푸 회장
中관료 환경오염 가능성 의심에
그 자리서 전해질 용액 마셔버려
주 5일 자정까지 근무 워커홀릭
‘철밥통’연구원 접고 비야디 설립
대다수 반대속 車회사 인수 베팅
LFP전지 도입 등 뚝심있게 추진
“그런 차 봤나요?” 지난 2011년 테슬라 CEO인 일론 머스크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비야디(BYD)가 향후 테슬라의 경쟁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내놓은 말이다. 당시 머스크는 코웃음을 치며 “난 그들이 좋은 제품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12년이 흐른 지난해, 자신의 인터뷰 영상이 다시 주목받자 그는 이를 X에 올린 후 “이 영상은 수년 전 일이다. 현재 비야디의 경쟁력은 매우 강하다”고 정정했다.
중국의 전기자동차 선두 업체 비야디의 기세가 거세다. 지난해 4분기 비야디는 전기차 52만6409대를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해, 48만4507대 판매에 그친 테슬라를 제치고 순수 전기차 판매 세계 1위에 올랐다. 머스크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가 된 것이다. 초기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성장한 비야디는 이제 중국을 벗어나 유럽, 동남아시아, 남미 등으로 수출을 늘리고 있다. 또 ‘미국의 앞마당’인 멕시코에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어 미국 자동차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멕시코 공장이 생기면 북미 3개국 자유무역협정(USMCA)을 활용해 관세장벽 없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속도로 성장하는 비야디의 기세에 비야디 창업자인 왕촨푸(王傳福·58) 회장의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 영업을 위해 배터리 전해질 용액을 마셔버릴 정도의 열정과 강력한 추진력, 밀린다 싶을 땐 과감한 베팅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는 과단성으로 회사를 이끌어온 왕 회장은 이른바 ‘불도저 리더십’의 전형이다.
◇형수가 금귀걸이 팔아 진학 도와…무자비한 워커홀릭의 탄생 = 왕 회장은 1966년 중국 안후이(安徽)성 우웨이(無爲)현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형과 누나 다섯 명, 그리고 여동생 한 명을 뒀는데 13세 때 아버지가 암에 걸리면서 안 그래도 가난한 집안의 가세가 완전히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돼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고, 어려운 형편에 다섯 누이는 일찍 결혼하고 여동생은 친척집에 맡겨졌다. 형 왕촨팡(王傳方)은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러 나갔다. 왕 회장도 형과 함께 돈을 벌겠다고 했지만 형은 남매들 중 가장 똑똑했던 그에게 학교로 돌아가라며 호되게 꾸짖었다. 왕촨팡에겐 돌아가신 아버지와 한 약속이 있었다. “똑똑한 촨푸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 그렇게 왕 회장은 1987년 중난(中南)공업대학 야금물리화학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대학 입학통지서를 받는 순간 그는 망설였다. 결혼한 지 막 3년이 된 형 가족에게 폐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는 몰래 합격통지서를 숨겼고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그의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알아차린 건 형수였다. 형수는 왕 회장을 설득했고, 자신의 혼수품이었던 금귀걸이 한 쌍을 팔아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다. 형수는 이후 대학 근처로 거처까지 옮겨 작은 장사를 하며 왕 회장을 돌봤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왕 회장은 베이징(北京)비철금속연구원에 들어갔고 모든 정력을 배터리 연구에 쏟아부었다.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5∼6일, 밤 11시 또는 자정까지 일하는데 이 생활 습관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왕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최우선은 일, 인생은 그다음”이라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무자비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대단한 워커홀릭이다.
배터리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한 왕 회장은 불과 5년 만에 부주임으로 승진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1993년 연구원은 선전(深)에 ‘비거(比格)’라는 이름의 배터리회사를 설립했고, 그를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엔 다른 계획이 있었다. 배터리 산업이 가진 막대한 시장 기회를 확신했던 그는 고심 끝에 소위 ‘철밥통’으로 불리는 직책을 버리고 창업을 결심했다. 1995년 2월, 왕 회장은 투자 관리에 종사하던 사촌으로부터 250만 위안(약 4억6000만 원)을 대출받아 ‘비야디과기회사(比亞迪科技公司)’를 설립했다. 비야디의 시작이었다.

◇전해질 용액 마신 패기…“에디슨과 웰치를 합치면 왕촨푸” = 창업 초기 왕 회장에겐 직원 20여 명과 선전에 위치한 낡은 차고, 그리고 250만 위안의 부채가 다였다. 당시 배터리 업계 1위는 일본 기업이었고, 중국 기업은 대부분 핵심 부품을 구입해 조립하는 데에 그쳤다. 왕 회장은 그동안 자신이 직접 연구한 기술을 활용해 충전용 배터리 핵심 부품인 ‘배터리 코어(전기 칩)’ 생산에 나섰다. 그 후 일본이 현지에서 니켈카드뮴 전지 생산 중단을 선포하고 나서자 왕 회장은 이를 기회로 삼아 니켈카드뮴 전지로 사업을 확장했다.
왕 회장은 저렴한 노동력과 생산원가를 기반으로 점차 저가 시장에서 발을 넓히는 한편 고급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생산기술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인재와 첨단설비 도입에 주력했다. 특히 연구·개발(R&D)에 집중해 제품 품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 결과 파나소닉과 소니, GE, AT&T 등 글로벌 기업들이 비야디의 고객사가 됐다. 1997년 비야디의 연간 매출은 1억 위안에 달했다. 이어 2001년 비야디는 세계 리튬 배터리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세계 4위 기업으로 도약했으며 니켈카드뮴 전지와 니켈수소 전지 시장에서도 각각 2, 3위에 올랐다.
여기엔 왕 회장의 뛰어난 추진력과 열정이 한몫했는데 이를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중국 관료가 회사를 방문해 배터리의 환경오염 가능성을 물으며 의심을 거두지 않자 그 자리에서 전해질 용액 한 컵을 다 마셔버린 것이다. 왕 회장은 “맛은 없다”며 얼굴을 찡그렸다고 한다. 당시의 일은 “왕촨푸가 완전히 미친 것처럼 보이는 일을 저질렀다”는 타이틀로 중국의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비야디는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의 투자를 받기 시작하며 전 세계 투자자들의 눈에 띄었는데, 그때 버핏에게 비야디를 소개한 찰리 멍거는 왕 회장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토머스 에디슨과 잭 웰치의 조합이다.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에디슨과 같고, 필요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웰치와 같다. 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활 건 베팅으로 위기 돌파…“한다면 한다” = 왕 회장은 2003년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2억6900만 위안에 시안친촨(西安秦川) 자동차의 지분 77%를 인수했다. 인수 후 홍콩 증시의 비야디 주가는 18홍콩달러(약 3000원)에서 12홍콩달러로 단번에 급락했지만 왕 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비야디의 시작은 내연기관 차량이었다. 2004년 비야디는 ‘316’이라는 첫 신차를 내놓았다. 하지만 다소 엉성한 모습의 차량에 딜러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이에 왕 회장은 망치로 신차를 부숴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를 계기로 내연기관 자동차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전기차 사업을 본격화했다.
이후 중국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비야디도 성장했다. 하지만 2012년 글로벌 업체들이 세련된 모델을 앞다퉈 출시하자 비야디는 한 차례 위기를 맞았다. 이에 왕 회장은 2016년 아우디 총괄디자이너 출신 볼프강 예거를 영입하고 자동차 엔지니어 수백 명을 고용해 자동차 모델을 완전히 재설계하는 강수를 뒀다. 이와 함께 충전식 리튬 배터리의 업계 표준인 니켈, 코발트, 망간을 더 저렴한 철과 인산염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두 번의 위험한 베팅에서 계속 성과를 내면서 상황을 반전시킨 것”(뉴욕타임스)이다.
투자를 결정할 당시 버핏은 왕 회장에게 비야디가 지금까지 어떻게 앞서 나갈 수 있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선두를 차지하고 유지할 것인지를 물었다. 왕 회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는 절대, 결코 쉬지 않을 것입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