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글로벌 경제 화두는 단연 ‘반도체’다. 각국의 반도체 투자 확대 소식이 연일 뉴스 1면을 장식하고 엔비디아 CEO의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 칩 공개에 글로벌 증시가 출렁인다. 강대국들의 반도체 패권 다툼은 이미 연초부터 격화하고 있는 모양새다. 반도체 전쟁을 뜻하는 ‘칩워(Chip War)’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미·일 간 반도체 갈등이 1차 전쟁이다. 미·일 반도체 협정과 플라자합의 끝에 일본은 반도체 왕국 지위를 내줘야 했다. 우리나라와 대만·일본·독일 간 출혈경쟁이 치열하던 2000년대 초반까지가 2차 전쟁이다. 현재의 3차 전쟁은 2대 강국인 미·중이 맞붙은 데다 AI 혁명까지 가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예측불허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을 넘어 ‘전략물자’로 급부상하며 국가 대항전 성격이 짙다. 반도체가 경제뿐 아니라 세계 정치 질서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나아가 국가 존망까지 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전 세계가 사활을 걸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 굴기’를 견제하겠다며 수출 통제 조치로 선제공격에 나섰던 미국을 비롯해 주요국들은 보조금 경쟁에 한창이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들이 거액의 보조금으로 유수의 반도체 기업 생산시설 유치를 추진하며 반도체발(發) ‘쩐의 전쟁’으로까지 불린다. 과거에는 이 같은 기업 지원 방식이 공정한 자유무역 질서를 해치는 ‘반칙’으로 간주됐다지만, 지금은 ‘뉴노멀’이다. 반도체 전쟁으로 패권 경쟁 승기를 거머쥐려는 ‘게임 체인저’ 미국은 ‘반도체법’을 만들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생산 및 연구·개발(R&D) 보조금용으로 5년간 527억 달러(약 70조 원)의 통 큰 지원을 약속했다. 텍사스주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에 170억 달러(약 22조 원) 이상을 투자한 삼성전자는 60억 달러(약 8조 원)의 보조금을 받을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두 번의 전쟁에서 연거푸 패했던 일본도 부활을 꿈꾸며 재기에 나섰다. 구마모토(熊本)현 양배추밭에 건설되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 대만 TSMC 공장에 일본 정부는 설비 투자액의 절반에 가까운 4760억 엔(약 4조 원)을 대주기로 했다.
2차 반도체 전쟁 이후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반도체 강국에 올라섰던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 정부도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지만, 반도체 산업단지 조성 기간 단축이나 세액공제 확대 혜택이 기업의 구미를 당길 만한 유인책인지 되짚어봐야 한다. 대대적인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미·일 반도체 기업들이 K-반도체 핵심 인력을 잇달아 빼내가고 있는 실정이다. 올 한 해만 60조 원 등 총 622조 원을 국내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에 투자하기로 한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투자 보조금 신설을 건의한 것도 머니 전쟁으로 비화한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흐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부의 올해 수출목표 7000억 달러 중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17.1%나 된다. 우리 경제의 반도체 의존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반도체 보조금 지급과 관련한 심도 있는 논의를 포함해 이번 반도체 전쟁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