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전화 통화된 지인 그와의 대화 속 나 자신 돌아봐 계획대로 살 수 없는 게 인생
많은 시련 속 ‘나’를 잃어버려 내가 내 삶의 주인일 때 비로소 타인과의 이상적인 관계 수립돼
몇 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 때문이었는데, 그이와의 통화는 근 십 년 만의 일이었다. 세상에. 십 년이라니. 그 긴 세월 전화번호도 바뀌지 않고,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데서 먼저 놀라웠고, 마음이 따듯해졌다. 십 년, 그 시간이 어디 보통 시간이던가. 십 년이란 세월은 어떤 일의 일가를 이루는 데 필요한 시간이고, 강산이 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인데. 그이 역시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도 나처럼 자글자글 주름이 패거나 눈가가 순하게 내려앉을지 모른다. 뭐하느라 연락 한 번 못했을까.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어찌 지내느냐고, 한번쯤 안부를 물어도 됐을 텐데, 너무 무심했다는 미안함도 들었다.
그렇게 십 년 동안의 간극으로 서로 데면데면할 법한 데도, 오랜만의 통화는 그 모든 간극과 무심함을 단박에 뛰어넘어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임의롭고 편안했다. 그 또한 놀라웠다. 그이와 통화를 하면서 그 시절을 상기했다. 그때 그랬었지.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괴었다. 당시 나는 한 지방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이는 그 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로 먼저 학교 밖에서 인사를 나눴던 사람이다. 나중에, 외래강사로 그 학교에 이름을 올리고 강의실을 드나들게 되면서 더 가까워졌다.
그이는 그랬다. 수원에서 남도에 있는 그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새벽 첫차를 타야만 했는데, 도착지에 내려서도 시 경계 밖에 있는 학교까지는 거리가 상당해서 나는 애를 먹었다. 수업 시간에 늦지 않게 가려면 택시를 타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 나를 위해 그이는 시간이 되는 대로 나를 기다렸다가 학교까지 태워다줬고, 또 수업이 끝나면 터미널로 데려다주곤 했다. 그 고마움을 나는 가끔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기다리고 운전하고 데려다주는 수고에 비하면 너무 부족한 일이지만, 그렇게나마 나는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곤 했던 것이다.
그때, 식사를 마치고 찾아 들어갔던 어느 찻집에서 그는 꿈을 꾸듯 자신의 지난날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 기분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고백은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지금의 자신을 다잡는 결기 어린 독백으로 들렸다.
그이는 처음부터 자신은 교수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오랫동안 은행에 근무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에 회의를 느껴 주변을 정리하고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렇게 돌아오지 않겠다고 모질게 마음을 먹고 떠났는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여기 이렇게 되돌아와 늙어가고 있다고 겸연쩍게 웃었다. 그 웃음 뒤에 많은 감정의 그늘들이 보였다. 회한과 후회와 아쉬움과 힘겨움 같은. 그는 은행에 근무할 때 꽤 높은 직위에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가 주는 책임과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살기 위해 도망치듯 떠났다고 했다. 그곳에서 부족한 공부를 하고, 나름대로 인생의 계획을 다시 세웠는데, 어쩌다 보니 돌아오게 되었다고, 삶이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계획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삶이라고 혼잣말하듯이 했다.
이 사람은 결핍을 알까? 탄탈로스의 갈증처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고통을 느껴 보았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다만, 성정이 워낙 착하고 순하다 보니 무한 경쟁 구도 속에서 무척이나 힘들었겠구나, 이해는 했다. 제법 긴 시들을 외우고, 운율을 실어 그 시들을 내게 들려주거나 좋아하는 팝송을 틀면서 그 내용을 해석해 주고, 꽃 이름을 외우고, 정성스레 꽃들을 키우고, 그 꽃들을 사진 찍어 상기된 얼굴로 나에게 자랑하는 그이가 은행에서 숫자들과 씨름하며 할당된 목표액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힘들어하고 마음을 바장이었을지 수긍이 갔다.
한데, 어쩌다 그동안 소원했던 것일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게 폭풍 같은 일들이 휘몰아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당뇨로 실명한 뒤 넘어져 엉덩이뼈가 부러진 어머니를 돌보느라 나는 여유가 없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상실감에 내 생활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버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어 마음을 다잡을 무렵에 덜컥 동생이 중병에 걸렸다. 나는 다시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내 일을 심기일전,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기 대신 동생 간병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난 십 년의 시간 속에 나는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시련 속에서든 나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이와 내가 다른 점은 그는 자신을 찾아 간단없이 도전하고 지켜냈지만, 나는 끊임없이 나를 비우는 일을 해 온 것이다.
이제는 알겠다. 자신이 목표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중심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을. 내가 내 시간의 주인이고, 내 삶의 주인일 때 비로소 타인과의 이상적인 관계가 수립되고 동반된다는 사실을. 내가 나를 긍정할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배려와 세상에 대한 긍정의 힘도 생긴다는 것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일. 그것은 타인을 배척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 되라는 말은 아니다.
그이는 그랬다, 그 통화에서. 그 시절이 참 아름다웠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쉽게도 그이가 제안한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날의 통화는 오랫동안 내 마음에 온기로 남았다. 뜻하지 않는 선물처럼. 다시 십 년 후 나를 회상할 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그때를 위해 오늘을, 지금을 잘 살아야겠다. 나를 잃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