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자 이인규가 말하는 故박철수 교수 유작 ‘마포주공아파트’
군사정권이 밀어붙인 마포주공
한국식 대단지 아파트 시작 알려
이촌·반포 거쳐 잠실까지 확장
단기간 대량공급에 유용했지만
주거지 대부분 단지로 재편되며
도시 전체가 ‘빗장공동체’전락
“‘역시, 우리 선생님이네’ 했어요. 수많은 연구 폴더 중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이렇게 탄탄한 단행본(‘마포주공아파트’) 한 권이 나올 수 있다니…. 제 책(‘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이랑 비교되는걸요.(웃음)”
한국 건축사의 기념비적 저서 ‘한국주택 유전자’(2021)로 학술상을 모조리 휩쓴 고 박철수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지난해 2월 세상을 뜬 그가 와병 중에 쓴 ‘마포주공아파트’가 최근 출간됐다. 스승의 유작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에 한달음에 달려온 제자 이인규 씨. 책을 만지작거리는 이 씨의 얼굴에는 그리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그는 박 교수의 지도로, 유년기를 보낸 둔촌주공아파트에 관한 석사 논문을 썼고, 이를 토대로 ‘케이 모던’ 시리즈의 두 번째 책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를 펴냈다. 한국만의 ‘현대성’을 조명하는 이 시리즈의 첫 권은 그동안 비어 있었는데, 박 교수의 ‘마포주공아파트’(이상 마티) 편집에 다소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 씨는 “아파트는 20세기 한국의 최대 발명품으로 그 본격적인 시작은 ‘마포주공’이었다”며 “한국의 모던(현대성)을 논할 때 가장 앞에 놓여야 할 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책은 한국식 아파트의 원형으로서 마포주공에 주목하고 그 시작과 끝을 파헤친다.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경제성장’의 가시적 성과로 마포주공 개발을 밀어붙였다. 기술적 문제로 계획했던 10층은 6층이 됐으나, 당시 1000세대 규모의 대단지는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여기에 자금난을 겪던 대한주택공사(현 LH)가 아파트를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하면서, 한국 주택 공급과 아파트 역사에 분기점이 만들어졌다. 즉 ‘대단지’ ‘분양’ ‘재개발’ 등 ‘한국식 아파트’의 주요 특징들이 만들어졌고 ‘아파트’는 이해관계에 따라 목소리를 내는 강력한 주체로 성장했다. 이 씨는 책의 가장 큰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아파트를 주택공급이나 주거환경 문제로만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모든 게 단지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개인뿐 아니라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까요.”
정부의 예산도, 주택도 부족하던 시절, 아파트 단지 개발은 주택을 단기간에 대량 공급하기에 유용한 방법이었다. 이후 아파트 단지를 만들어 분양하는 방식이 고착화되면서 마포에서 시작된 아파트 단지 신화는 이촌동, 반포를 거쳐 잠실에서 완성된다. 1978년 준공된 잠실주공아파트는 모든 편의시설을 단지 내에 완벽히 갖춘 ‘한국형 아파트 단지’의 전형을 보여준다. 저자는 “기존 시가지의 공원, 주차장, 놀이터 같은 필수 기반시설에 투자하지 않고 아파트 단지 건설로 대응한 결과, 아파트 단지는 한국 사회의 태양이 됐다”고 지적한다. 또 “주거지 대부분이 아파트 단지로 재편되면서 도시가 크고 작은 ‘빗장 공동체’의 집합으로 변해 버렸다”고 비판한다. 이 씨는 박 교수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지금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빗장 도시’”라고 꼬집었다.
아파트를 둘러싼 모든 건 격하고 치열하다. 아파트 가격이 정권의 명운과 개인의 인생을 좌우하고, 정치적 입장이나 교육체계에도 결정적 인자로 작동한다. 이를 두고 책은 우리가 여전히 ‘마포주공아파트 체제’에 살고 있다고 꼬집는다. 한국 최초의 아파트 단지였던 마포주공아파트는 1994년 최초의 ‘재개발’ 아파트 단지가 돼 그 신화를 이어간다. “대한민국의 공간 생산 방식이자 규범”이며 “한국인의 세계관과 일상을 지배하는” 체제가 된 것. 박 교수의 ‘아파트 보는 눈’을 물려받은 이 씨는 그 체제가 극대화한 풍경을 둔촌주공아파트 재개발 과정에서 발견한다. 그의 둔촌주공 연구서는 둔촌을 떠나 외부인의 시선을 장착한 후 쓴 것이지만, 그는 “둔촌으로도, 아파트로도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보통 사람의 집, 즉 주거사 연구로 한국 건축사의 공백을 메운 박 교수 역시 아파트를 공부하며, 아파트를 떠났다. 그러니까 두 사람 다 어떤 식으로든 ‘마포 체제’를 벗어난 셈이다. SNS에서 ‘아파트 덕후’들의 구루(스승)로 활약했던 박 교수는 일명 ‘살구나무집 아저씨’로 통했다. 아파트를 나온 후 기른 살구나무가 그대로 아이디가 됐다. 이 씨는 “아이디가 주는 느낌처럼 늘 따뜻하고 모든 제자에게 공평하며 다정했다”고 박 교수를 떠올렸다. 이 씨의 눈이 잠시 촉촉해지는 듯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는다. “선생님 책이 더 많은 독자에게 전해지면 좋겠어요. ‘마포’ 읽고 ‘둔촌’도 읽어 주세요. 아니다, ‘한국주택 유전자’부터 읽으시면 어떨까요? 하하.”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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