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권에서는 선거철만 돌아오면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구호가 하나 있다. 1992년 대선 당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 진영이 내걸었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다. 클린턴 후보 선거참모였던 제임스 카빌이 만든 이 구호는 유권자 관심은 거창한 군사·외교보다 경제, 즉 먹고사는 문제라는 점을 정확히 짚어 걸프전 승리로 한때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공화당 후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을 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 주요 선거에서는 경제 이슈가 승패를 좌우한다는 믿음이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경기 호황이면 현직 대통령·총리가 승리하거나 정권을 재창출하고, 불황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올해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는 이 구호가 생명을 다한 모습이다. ‘나 홀로 호황’에도 조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유권자 평가는 인색하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가 호황인데도 유권자들이 바이든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낙제점을 주는 현상은 경제 전문가 사이에서도 수수께끼로 불린다. 경제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에서 선임연구원으로 활동 중인 여한구 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경제지표는 너무 좋은데 왜 지지율과 괴리가 클까. 가장 큰 원인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일 것”이라며 “당장 마트 가서 장 보고 기름 넣는데 20% 오르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시경제가 좋고 일자리가 늘어도 혜택받는 대상은 제한적이지만 물가 상승은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덧붙였다. 결국, 유권자들의 경제 평가는 지표상 숫자보다 오늘 마트·시장에서 맞닥뜨린 가격표로 결정된다는 분석인 셈이다. 당장 10일 치러진 한국 총선에서 물가에 대한 불만이 앞뒤 잘린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875원’ 발언으로 증폭돼 판세를 흔들었다는 평가다. 더불어민주당도 ‘비명횡사 친명횡재’ 공천 파동을 시작으로 이재명 대표의 ‘셰셰(謝謝)’ 발언, 양문석 후보의 불법대출 논란, 김준혁 후보의 막말 논란 등 숱한 악재가 있었지만 ‘대파 총선’으로 끝난 것은 물가 문제가 가진 휘발성·폭발력을 보여준 셈이다.
물가 이슈가 한미 양국 모두에서 현 집권당에 대한 공격 빌미가 되고 있지만, 야당 역시 물가 안정에 무관심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각종 유세에서 “미국 경제가 파멸의 시궁창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재선에 성공하면 모든 수입품에 10% 보편 관세를 매기고 중국에는 60% 이상 관세를 일률적으로 적용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평균 3% 안팎인 미국의 수입 관세율이 상승하면 교역 상대국의 보복마저 더해져 물가 상승은 불 보듯 뻔하다. 한국 야당은 한술 더 뜬다. 국가채무가 1100조 원대로 불어난 상황에서 대기업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어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 원씩 민생회복지원금 13조 원을 풀자는 주장이다. 시중에 돈을 풀면 물가가 더 뛸 것이라는 상식에 눈감은 포퓰리즘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경제학에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격언이 있다. 결국, 진짜 물가 대책은 섣부른 재정·통화정책 남발보다 인내심을 갖고 시장 경쟁 활성화·혁신 등에 나서는 방법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