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 정부때 북방외교 실행
靑비서실장·국회의원 등 지내
은퇴 뒤엔 제자들과 공부 모임
김영호 통일장관 등 멤버 참여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앞장 서
혈액암 투병하다 악화돼 타계
“체제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지켜달라.”
혈액암으로 투병해온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23일 임종 직전까지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남긴 말이다. 노 전 총리는 한국 국제정치학계의 태두이자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가 겸 정치인이었다. 국무총리와 국회의원을 지낼 때에도 그의 관심은 늘 대한민국을 ‘체제 전복의 위기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에 놓여 있었다.
노 전 총리는 1년 전 혈액암 판정을 받고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혈액투석 등 치료를 받아오다 23일 병세가 악화해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 진료를 받던 중 이날 밤 유명을 달리했다.
노 전 총리는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미국 브리검영대를 거쳐 뉴욕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1987년) 작성에 참여해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내는 데 기여했다. 이를 인연으로 노태우 정부 때인 1988년 청와대 외교담당특별보좌관에 임명돼 중국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수교 등 북방정책에 관여했다. 1990년 대통령 비서실장과 제22대 국무총리를 거쳐 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서울대로 돌아와 외교학과 교수로 일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 토크빌 등 정치사상과 이론에 정통한 국제정치학계의 태두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청년학자 시절 이철승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에게 ‘중도통합론’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일화도 남겼다. 1988년에는 “광주 사태(민주화운동)는 김대중 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 기술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는 발언이 논란이 돼 강경보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노 전 총리는 은퇴 이후에도 제자그룹 및 시민사회 활동가 등과 함께 공부 모임을 만들어 꾸준히 한국 지식사회의 플랫폼을 운영해 왔다. 2013년 ‘목요공부방’으로 시작된 모임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 ‘한국자유회의’로 이어져, 정기적인 대화와 토론을 벌였다.
성신여대 교수 출신인 김영호 통일부 장관,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전교모) 공동대표를 지낸 조성환 전 경기대 교수 등이 공부 모임 멤버다. 노 전 총리는 일련의 공부와 연구를 토대로 대한민국 체제 위기를 상세하게 파헤친 ‘정치학적 대화’(2015),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2018) 등을 펴냈다.
강량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정치학 박사)은 “총리님의 최대 관심은 전체주의의 전복 전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도희윤 ‘한국자유회의’ 사무총장은 “총리님은 공부 모임에서는 물론, 병상에서도 ‘지성인들이 체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소임을 다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고 회상했다.
유족으로는 서울대 동기인 부인 지연월(88) 씨, 미국 거주 중인 딸 모라(62) 씨, 그리고 아들 진(57) 씨가 있다. 빈소는 25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지며, 장례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27일 오전 발인.
허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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