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95년 3월. 당시 집권 여당 민자당이 기초자치단체 선거의 정당공천 배제를 추진하자 야당이 이를 막으려 서울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을 점거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경호권을 발동해 법안을 처리하라 요구했지만, 황낙주 의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7일 동안 야당 의원들이 공관을 점거하는 바람에 외부적으로는 심각한 상황으로 알려졌으나 공관 내부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24부작 ‘모래시계’ 드라마의 비디오테이프를 누군가 가져왔는데 공관 접견실에서 황 의장과 야당 의원들, 기자들이 이를 시청하느라 모두 정신이 팔렸다. 황 의장이 야당 의원들에게 감금당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지만, 사실 황 의장과 야당 의원들은 ‘모래시계’를 같이 시청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7일 만에 경찰에 의해 끌려 나오기는 했으나 당시 여야 관계는 그나마 낭만과 여유가 있었다.
지난 2002년 3월 이만섭 국회의장 주도로 국회법이 개정돼 의장이 당적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자동으로 당적이 상실되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탈당계를 제출하도록 했고, 이런 관행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정계 은퇴로 연결된다. 그만큼 중립성과 독립성을 중요시한 것이다. 그런데 제22대 국회에서는 다수당인 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들이 앞다퉈 중립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회 선진화법 이후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이 ‘천재지변·국가 비상사태·여야의 합의’ 등으로만 한정돼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국가 의전서열 2위의 위상은 갖고 있다. 제21대 전반기 박병석 의장과 후반기 김진표 의장은 민주당 출신이긴 하지만, 국회 본회의나 중요 법안은 여야가 합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야당의 유력한 차기 의장 후보인 추미애 당선자는 이런 의장들을 비판하면서 “중립은 없다”고 선언했다. 정성호·조정식 후보도 마찬가지다. 극렬 지지층인 ‘개딸’의 위력을 체감한 만큼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진표 의장이 여야가 합의하지 않은 채상병특검법을 상정할 수 없다고 하자 이젠 박지원 당선자가 ‘개××’라고 욕했다. 국회가 ‘개○’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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