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돌아가신 장모를 오랫동안 장모님이라고 불렀다. 장인과 장모에게 사위가 아버지, 어머니라고 많이들 부른다는 걸 모르진 않았으나 아무래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어색하였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어머니라고 부르니 장모도 아내도 좋아하였다. 더 일찍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외조부모가 돌아가신 지도 꽤 오래다. 어려서 명절에 가끔 뵙고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라고 부를 때마다 ‘외’자 발음이 잘 안 돼 부르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친가의 할아버지는 발음이 쉬웠는데 외할아버지는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는 발음하기 힘들어도 당연히 그렇게 불러야 하는 줄로 알았다. 아무도 ‘외’자를 빼고 불러도 좋다고 하는 어른이 없었다. 굳이 ‘외’자를 넣어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많이 든 뒤였다.
처가와 외가의 호칭을 친가와 구별하여 차이를 둔 것은 우리의 오랜 관습이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차이를 두고, 남자 쪽을 앞세우는 풍속이 호칭에서도 차이를 만들었다. 가부장제가 강하게 유지될 때는 대체로 친가와 처가, 친가와 외가를 엄격하게 구분하였고, 호칭은 그런 구분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우리는 저 먼 고려시대나 삼국시대부터 그렇게 불러온 관습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오래된 관습으로 알고 있는 장인, 장모의 호칭도 실은 400년 정도 써 온 호칭일 뿐이다. 그 정도도 오래되었다면 오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전에는 친가와 처가, 본가와 시가의 호칭에 그렇게까지 엄격한 구분이 없었다는 말이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사위가 처부모를 친부모와 똑같이 어머니와 아버지로 불렀다. 조선시대 유학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에게 제자인 한강 정구(鄭逑)가 아내의 집안사람을 친가와 똑같이 형과 아우, 숙부와 조카라고 부르며 장모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그런 풍습이 과연 옳은지를 물었다. 그 질문에 퇴계는 그런 풍속이 실제로 있으나, 어느 것도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조선 중기만 해도 영남 지역에서는 남자가 친가와 처가를 구별하지 않고 호칭을 똑같이 썼다는 사실을 퇴계와 그 제자의 문답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아마도 다른 지역은 더 그랬을 것이다.
옛날에는 15세 전후로 결혼하고, 신혼에는 사위가 처가에서 몇 년을 지내는 풍속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처부모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렀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처가와 친가의 사회적 지위에 큰 차이가 없었고, 남녀의 실질적 지위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던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퇴계나 한강이 과거의 호칭 문화에 불만을 표시하고, 이후 처부모를 장인과 장모로 부르는 관습이 정착된 것은 친가와 처가를 구별하고 남녀의 지위를 차별하는 성리학 이념이 조선 사회에 깊이 스며들면서 굳어진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그런 구별이 사라지는 지금의 현상은 과거에 없었던 문화가 새로 등장한 것이라기보다는, 먼 옛날 우리의 문화를 회복한 셈이 된다. 가부장제와 남녀 차별 등 우리 사회의 여러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바뀌는 현상을 호칭이 점차 반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친족들 사이에서 부르는 호칭에도 오랜 사회적 관습이 은밀히 숨어 있다. 우리의 친족 관계 호칭은 매우 세밀하고 복잡하다. 친가·처가·외가에 따라 다르고, 그 안에서 또 촌수에 따라 복잡하게 구분된다. 관계의 그물이 촘촘하고 하나하나 서로 다른 호칭으로 부른다. 그 호칭은 관계의 그물 속에 내가 자리한 위치를 보여주고, 가깝고 먼 관계를 표시한다. 친족 관계에서 잘게 나뉜 호칭은 사회의 각종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지위의 높낮이가 엄격하고, 상하 관계가 잘 지켜지는 사회일수록 호칭은 세분화되어 있고, 관계가 수평적일수록 호칭은 단순하다. 과거에서 현재로 올수록 사회 전반의 호칭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호칭의 변화는 관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현대사 100여 년 동안 극심한 변화를 겪었고, 호칭 역시 그에 적응하여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익숙하던 호칭이 잘 사용되지 않는가 하면 낯선 호칭이 새로 사용된다. 똑같은 호칭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하기도 한다. 한 세대 안에서 일어나는 속도 빠른 변화이다. 세상의 관계는 점차로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것을 선호한다. 젊은 사람일수록 우리나라 친족 관계의 세밀한 호칭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낯설어한다. 그것이 대세이다.
내가 재직 중인 대학에서도 최근 직원 호칭에 큰 변화가 생겼다. 직원 전체의 호칭을 선임·책임·수석의 세 계단으로 구분하기로 하였다. 이전에는 직원·주임·계장·과장·차장·부장의 여섯 계단으로 구분하여 불렀는데, 절반으로 줄었다. 이전 호칭에서는 상하 관계라는 느낌이 분명하게 들었으나 새 호칭에서는 그런 느낌이 약하다. 호칭이 단순해지고 상하의 수직적 느낌이 약해지는 변화는 회사와 기관 등 많은 조직에 널리 퍼져 있다. 우리 대학만의 변화는 아니나, 익숙한 호칭을 버리고 대신 새 호칭을 부르려니 무척 어색하다. 장모님이라 부르다가 어머니라고 바꿔 부를 때는 훨씬 더 어색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색함이 사라졌으니 직원의 호칭도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