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주필

총선 참패보다 더 나쁜 무기력
英 보수당 암흑기와 유사 상황
중도 전략과 세대교체로 극복

보수는 질서 있는 변화에 앞장
성장 둔화로 분배 중요성 증폭
박정희 넘는 21세기 敍事 절실


윤석열 대통령은 방향을, 국민의힘은 중심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다. 보수 정치세력은 총선에서 3연속 패배하면서 지지기반이 영남과 65세 이상 세대로 쪼그라들었다. 그럼에도 처절한 반성과 재기 노력은 고사하고 의례적 정풍·쇄신·세대교체 운동 조짐도 없다. 유신·5공 권위주의 시기의 보수 여당도 이렇게 무기력하진 않았다.

국민의힘 참패엔 패배의 동심원이 작용했다. 가장 외곽의 첫째 동심원은 대선 연합 파괴다. 이준석 대표가 ‘이대남’, 단일화 양보를 한 안철수 후보가 3040 중도 표를 끌어들여 간신히 0.73%포인트 이겼다. 그런데 이준석을 내치고 안철수를 “국정 방해꾼”이라고 비난했다. 이것만으로 대세는 결판났다. 둘째, 윤 대통령은 자신이 정치를 모른다는 사실도, 지지층이 얼마나 취약한지도 몰랐다. TK 유권자들은 지역 연고가 없음에도 좌파 집권을 막을 대안으로 마지못해 지지했다. 이번 총선에서 호남 유권자들이 윤석열에 맞설 적임자라는 이유만으로 조국을 지지한 것과 데칼코마니다.

셋째, 전공의 사태 담화와 이종섭·황상무 파문은 마지막 폭탄이 됐다. 국민 눈높이는커녕 여당 요구에도 못 미친 오만한 대응이 문제였다. 야당이 김준혁·양문석 후보를 출당시켰더라면 개헌 저지선도 무너졌을 것이다. 넷째, 마리 앙투아네트 소동과 친윤 공천을 둘러싼 한동훈과의 충돌에 김건희 여사와 비선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런 꼴불견에 보수 지지층조차 혀를 찼다. 대구 투표율이 전국 최저(제주 제외)였다.

300년 역사의 영국 보수당은 훌륭한 참고서이다. 보수당이 마거릿 대처 시대를 거치며 18년간 황금기를 누리는 동안 와신상담한 노동당은 41세의 토니 블레어를 당수로 선출했다. 블레어는 ‘제3의 길’을 내세워 3년 만에 영국 정치사상 최대 압승을 했다. 하원 의석의 63%(659석 중 418석)를 휩쓸었다. 이번엔 보수당이 무너졌다. 총선에서 3연패 당했다. 서부 웨일스와 북부 스코틀랜드에는 단 1석도 없고, 동남부 잉글랜드에만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됐다. 영남에서 명맥을 유지한 여당 형세와 흡사하다.

이런 최악 상황에서 보수당은 39세의 데이비드 캐머런을 선택했다. 캐머런은 “땜질 아닌 재창당(not mend but create)”을 내걸고 ‘역방향 제3의 길’에 도전했다. 전통 보수당원은 좌파라고 맹비난했다. 캐머런이 아니라 카멜레온이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현란한 수단을 동원해 좌표축을 중도로 옮겼다. 2010년 총선에서 단독 과반엔 못 미쳤지만 제1당에 올라 연립정부를 주도하고, 2015년엔 단독 집권에 성공했다.

지금 국민의힘 사정은 보수당 암흑기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다. 윤 대통령부터 ‘보수’보다 ‘자유’를 외치고, 중도와 신세대를 대변하려는 인사도 많다. 중도로 이동해야 할 근원적 요인은 급격한 성장률 저하다. 1980년대엔 9%대, 1990년대 7%대, 2000년대 5%대, 2010년대 3%대, 2020년대 들어선 1∼2%대를 오르내리는데 지난해는 1.4%였다. 성장으로 분배 욕구를 잠재울 수 있던 시대는 끝났다. 그런데도 박근혜 후보 때 경제민주화가 잠깐 시도됐을 뿐 변하지 않았다. 그 이후 보수 정당이 총선에서 계속 패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보수는 결코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보수주의는 이념(ism)이 아니라 행동 양식이나 사고방식이라고도 한다. 혁명 같은 파괴적 변화를 예방하기 위해 질서 있는 변화를 오히려 선도했다. 미국 공화당은 당대 최고의 진보적 가치였던 노예해방을 계기로 결성됐고, 영국 보수당은 정치적 불이익을 알면서도 선거권 확대에 앞장섰으며, 독일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사회보험 등 세계 최초로 복지국가 모델을 도입했다.

당면 정치지형은 물론 시대적 흐름을 보더라도 한국판 제3의 길 이외의 대안은 없다. 6070 원로 보수는 3040 젊은 보수를 돕는 병풍 역할로 물러서야 한다. 신세대 정치인을 이해하고 키워야 한다. 반세기 전 40대 기수론 때도 구상유취라고 비판했지만, 젊은 세대가 옳았다. 건국전쟁 100만 관객, 천안함 딸 편지 영상 1000만 뷰에 머물러선 안 된다. 이승만·박정희·정주영·이병철을 대체할 21세기 보수의 서사(敍事)가 필요하다. 보수+자유 대연합 없이는 윤 정부 성공도, 다음 대선 승리도 꿈꿀 수 없다.

이용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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