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양 아래서 나는 네 편이야. 너는 무심하게 내 마음을 밟고 지나가. 행성들을 모아 모래성을 지어줄게. 난 널 안타까워하지 않아. 우린 결코 같은 편이 아니지. 그렇지만 난 그저 네 편이야./ 나는 최대한 참을 수 있을 만큼 참다가 불을 켠다. 나는 이곳을 단번에 밝게 만든다.’

- 이다희 ‘하루보다 긴 일기’(시집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며칠 전부터 유튜브에 접속하면 아기들의 일상이 담긴 영상이 추천된다. 어떤 이유로 이와 같은 알고리즘이 형성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평소 내 관심 영역이 아닐뿐더러, 근래 아기들의 이른바 ‘잊힐 권리’에 대한 논의도 알고 있어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다. 그러나 한두 번 보다 보니 어느덧 즐겨 보게 됐다.

아기들 영상에 매혹된 데에는 아기들의 천진함, 그로부터 느껴지는 귀여움이 클 것이다. 거칠 것 없는 아기의 감정 표현은 정직하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 못마땅하면 울고 즐거우면 온 힘을 다해 웃는다. 설령 속셈이 있다 해도 빤해서 도무지 기만이란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영상이란 매체는 편집되기 마련이지만 정작 그 속의 아기만큼은 고스란하게 자신을 내보여주며 ‘우리’를 웃음 짓게 한다. 그러나 내가 아기들 영상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아기와 부모가 점점 더 ‘가족’이라는 한 ‘묶음’이 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어서다. 신뢰라 해도 좋고 사랑이라 해도 좋으리라. 느닷없이 나타난 한 존재에 의해 개인과 개인이 한편으로 단단히 결속해가는 과정이 내게 건네는 위로란 뜻밖에 참 크다. 죽어도 한편. “그저” 내 편.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 친구, 동료. 서로의 뒤편에 서서, 어려울 때 힘이 빠질 적에 가만히 뒷배가 되어주는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어째 마음 한 편이 따뜻해진다.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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