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속의 This week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의 처방전에 의사는 이렇게 썼다. 가난한 환자들의 치료비를 대신 내주고, 병원비가 없어 퇴원을 못 하는 환자에게 뒷문을 열어줘 몰래 나갈 수 있게 했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의 일화다. 그는 6·25전쟁 중이던 1951년 6월 21일 부산의 한 교회 창고를 빌려 문을 연 복음병원(현 고신대복음병원)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25년간 이곳의 초대 원장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1932년 일제강점기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양의대 외과 교수를 지내다 1950년 전쟁통에 아내와 다섯 남매를 두고 차남만 데리고 월남했다가 그 길로 이산가족이 됐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정부가 특별 상봉을 제안했지만,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주위에서 재혼을 권유해도 아내를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지냈다.
부산으로 내려온 장 박사는 유엔으로부터 약을 원조받아 천막에서 피란민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공짜로 병을 고쳐준다는 소식에 하루 200명의 환자가 몰렸다.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해지자 그는 돈 없는 사람들도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의료보험제도를 고안했다.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립했고, 이는 1989년 실시한 정부의 전 국민 의료보험의 모델이 됐다. 1975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해 가난한 이들을 치료했고, 틈만 나면 사재를 털어 무의촌 진료 봉사를 다녔다.
장 박사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외과의였다. 1943년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의 암 덩어리를 떼어내는 수술에 성공했다. 1959년에는 간의 70% 이상을 드러내는 간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했다. 대한간학회는 이날을 기념해 ‘간의 날’로 지정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경성의전에 입학할 때 다짐했던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한평생 환자를 위해 헌신했다. 이러한 공로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청빈의 삶을 살았던 그는 집 한 채 없이 복음병원 옥탑방에서 기거하다 1995년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났다.
‘바보 의사’로 불리며 평생 어려운 이들을 위한 인술을 펼쳤던 장 박사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인술은 다른 게 아닙니다. 자기 눈앞에 나타난 불쌍히 여길 것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인술하는 사람이에요. 그건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다만 하는가 안 하는가 그 차이지요.”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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