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 속의 This week
1966년 6월 25일 밤 9시, 사람들이 라디오와 TV 앞에 모였다.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와 도전자 김기수의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타이틀전이 벌어지는 서울 장충체육관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경기 전 벤베누티의 우세가 예상됐지만, 15라운드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심판 판정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 부심은 김기수, 이탈리아 부심은 벤베누티의 손을 들어줬다. 마지막 미국 주심의 점수에 승패가 달렸다. “벤베누티 68, 김기수 74.” 그러자 일제히 터져 나온 환호성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1939년 함남 북청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기수는 1·4 후퇴 때 가족과 월남해 여수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중학생 때 복싱에 입문했고, 서울 성북고에 진학해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 아마추어 통산 87승 1패로 승승장구한 그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긴 상대가 바로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만난 벤베누티였다. 프로에 뛰어든 그는 1965년 동양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고 이듬해 세계 챔피언에 도전했다.

당시 벤베누티가 요구한 대전료는 5만5000달러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도 안 되던 시절 대전료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던 그를 박정희 대통령이 불렀다. 박 대통령은 “이길 자신 있어요?”라고 물었고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대답에 정부에서 대전료를 내주도록 지시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 광복 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선수가 세계 정상에 오르자 장충체육관에서 경기를 지켜본 박 대통령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국민적 영웅이 된 그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2개월 뒤 그가 배우 김지미, 박노식과 함께 출연한 ‘내 주먹을 사라’는 영화가 상영될 정도였다.
1968년 3차 방어전에서 판정패해 챔피언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프로 통산 49전 45승 2무 2패의 기록을 남기고 글러브를 벗었다. 은퇴 후 사업가로도 성공해 명동에 건물을 사고 ‘챔피언 다방’을 운영했다. 갑작스럽게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했으나 결국 1997년 6월 58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4전 5기 신화의 주인공 홍수환은 고교생 때 김기수의 카퍼레이드를 보고 권투를 시작해 1974년 그의 뒤를 이어 2대 세계 챔피언이 됐다. 김기수 이후 한국은 세계 챔피언을 40여 명 배출하며 1970∼1980년대 프로복싱 강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세계 챔피언이 자주 나오지 않았고, 복싱 인기도 과거에 비해 주춤해졌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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