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말 미국 백악관은 ‘연방정부·21개 주(州)정부가 저렴하고 깨끗한 에너지 공급에 필요한 전력망 현대화를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의 계획을 발표했다. 청정에너지 장려 정책으로 태양광·풍력 발전 투자가 급증했지만, 막상 전기를 실어나를 송배전망이 낡거나 부족하다 보니 생산된 전기가 무용지물이 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같은 달 유럽 전기사업자협회는 한 포럼에서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유럽 그린딜’에 따라 설정한 탄소배출량을 준수하려면 2050년까지 유럽 전력망을 확충하기 위한 투자액을 2배로 늘려야 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에 앞선 지난해 4월 EU는 전력망 건설 시 환경규제를 대폭 간소화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올 세계 에너지협의회 연차총회 주요 화두 중 하나도 전력망이었다. 전 세계가 이처럼 앞다퉈 전력망 확충에 나서는 것은 폭증하는 전력 수요,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재생에너지 확대 흐름과 무관치 않다. 인공지능(AI)의 폭발적 성장과 이에 따른 데이터센터 구축·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전기화 확대로 전력 소비가 급증하고, 탄소 감축을 위해 무탄소 전원인 재생에너지를 늘리면서 전기를 보낼 송배전망 수요도 급격히 따라 늘어난 것이다.
구축 적기를 놓쳤다가는 자칫 ‘전력대란’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전력망 확충은 ‘생존의 문제’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5월 말 공개된 ‘제11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전기본) 실무안’은 AI·반도체 수요에 대응하고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2038년 최대 전력 수요가 129.3GW에 달한다고 내다보고 이를 감당하려면 발전설비가 10.6GW 추가돼야 한다고 전망했다. 이에 대형원전 3기와 소형모듈원전(SMR) 1기를 투입하고, 2030년 태양광·풍력 설비를 2022년 대비 3배로 확대해야 한다는 게 실무안을 만든 전기본 총괄위원회 권고다. 총괄위는 그러면서 전력망 확충을 가장 긴급한 과제로 꼽았다. 정동욱 전기본 총괄위원장이 “전원계획을 아무리 수립해도 결국 성공 여부는 전력망 확충에 달렸다”고 했을 정도다. ‘제10차 장기송변전설비계획’만 보더라도 2023년 설비계획 규모 대비 2036년 송전선로는 1.6배로, 변전소는 1.4배로 각각 증가한다.
문제는 전력망 확충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정부 주도로 지역 간 갈등을 조정해 전력망을 신속히 건설하기 위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제정이 추진됐지만, 지난 국회에서 폐기 처리됐다. 특별법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전력망위원회에 정책결정 심의·의결 권한을 부여해 속도감 있는 사업 추진을 유도하고 인허가 제도도 대폭 개선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수도권 2600만 가구가 1년 사용할 전력량의 30% 이상을 보낼 수 있는 동해안-수도권 초고압직류송전(HVDC) 건설사업은 아직도 주민 20%의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 동해안-신가평 HVDC 건설 역시 88개월,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는 137개월 준공이 지연됐다. 우리 경제의 ‘생명줄’이 된 송배전선 건설의 ‘골든타임’을 실기하지 않도록 제22대 국회는 전력망 확충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