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의 메카로서 명동의 지위가 옛날 같진 않지만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 관련 방송 뉴스에서는 아직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골 장소다. 50대 후반인 필자가 어쩌다 가보면 한국인과 외국인 반반의 풍경이 펼쳐져 그 위력을 실감한다. 그 명동의 동쪽 끝에 우리나라 가톨릭의 대표적인 상징인 명동성당이 있다. 1887년 겨울에 언덕을 깎아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지만 우여곡절을 겪다가 1892년 5월 8일에서야 기공식을 가졌고, 6년이 지난 1898년 5월 28일에 축성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후 명동성당은 서울을 넘어 우리나라 전체에서 어느 건물, 어느 장소 못지않게 근현대 역사의 산증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지금은 빌딩 숲에 둘러싸여 도시 속에 숨었지만 건축 당시는 도성 안 어디에서 바라봐도 하늘 높이 우뚝한 명동성당의 모습은 탁월한 랜드마크의 역할을 했다. 다른 문명권이나 국가에서는 흔한 모습이겠지만 조선에서는 놀라운 현상이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궁궐의 건축물들도 당연히 탁월한 풍경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입로부터였을 뿐 명동성당처럼 도성 안 어디에서도 바라보이는 탁월함은 아니었다. 조선은 궁궐을 포함하여 모든 건축물을, 도성 안 어디에서 바라봐도 보이는 탁월한 랜드마크의 형태로 만들지 않았다. 산 밑에 높고 웅장한 산의 위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건축물의 높이와 규모를 조절하여 만든 결과다. 이유는 풍수 때문인데, 당시 이런 식으로 도시 건축물을 설계한 것은 세계에서 조선이 유일했다.
명동성당이란 이름은 해방 후 새로 만들어졌고, 그 이전에는 종현성당이라 불렸다고 한다. 왜 종현이란 지명이 앞에 붙은 걸까? 종현성당은 유럽에서처럼 더 높고 웅장하게 보일 수 있도록 북달재 또는 북고개라 불린 고개 위에 만들었고, 이 고개를 한자 鐘(쇠북 종)과 峴(고개 현)의 뜻을 빌려 鐘峴이라 표기했다. 한자의 소리로 읽으면 종현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북달재성당 또는 북고개성당으로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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