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40개 의대 본과 4학년은 의사 국가시험에 대한 응시 의사를 표명합니다.”
의대 증원에 반발한 의사 총파업이 일단락됐던 2020년 9월 말 짧은 성명서가 나왔다. 파업에 힘을 싣기 위해 시험을 거부했던 의대생들이 상황이 바뀌자 정부에 ‘국시 구제’를 요청한 것이다. 성명엔 집단행동이 몰고 온 사회적 파장에 대한 사과는 단 한 줄도 없었다. 여론은 냉담했다. 정부 입장도 ‘재시험 불가’였다. 의사단체는 국시 거부가 ‘의로운 행동’이라면서 ‘파업 카드’를 앞세워 정부를 압박했다. 그해 말 결국 정부는 국시 구제를 발표했다. 공정성 논란은 거셌다. 교원 임용 등 다른 국시에 응시한 코로나19 확진자들은 시험 기회를 박탈당하던 때였다. 기회의 창은 의대생들에게만 열렸다.
당시 의대생 대다수는 지금 전공의다. 가장 먼저 병원을 무단이탈한 후 다섯 달 내내 의료 파행 사태를 강경하게 주도한 세력이다. 최근 이들은 두 차례에 걸쳐 ‘대사면’을 받았다. 보건복지부는 각종 명령을 어긴 전공의들을 병원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행정처분 철회, 수련 기회 보장 등 온갖 특혜를 줬다. 의료계 대응은 더 거칠어졌다. 전공의들은 법적 걸림돌이 사라지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서 역공에 나섰다. 의대생들은 올해 국시를 거부하고 있다. 의대 증원을 백지화시키기 위해서다.
정부가 열어준 퇴로가 의사들 기세를 올리는 계기로 작용한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이는 의사가 뭉치면 정부는 백기를 든다는 선례 탓이다. 똑같은 방법은 늘 통했다. 국시 거부만 해도 2000년 의약분업 파업 당시 의대생들이 썼던 투쟁 수단이다. 그때 국시 구제를 받았던 의대생과 파업을 이끌던 전공의들이 얼마 전 무기한 휴진을 강행한 의대 교수들이다. 적당한 타협이 불러온 결과다.
정부의 ‘결단’은 의사가 법 위에 있다는 걸 입증했다. 의사에게 매번 굴복한 정부의 이유는 늘 같다. 의사 배출에 차질이 생긴다는 명분이다. 정부가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원칙을 저버리자 국민 생명은 의사 집단이익을 지키기 위한 볼모로 전락했다. 대체재가 없다면 대책을 만들었어야 했다. 의료 행위를 독점한 의사 파업을 막는 장치를 진작에 법제화했어야 할 일이다. 몇 차례 파업을 겪고도 정부는 20여 년간 손 놓고 있었다. 덕분에 의사는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천룡인’으로 불린다.
원칙이 무너지면 당위성은 흔들린다. 막강한 민·형사상 권한을 가진 정부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고서도 전공의들에게 무릎 꿇었다. 환자 곁을 끝까지 지켰던 전공의들 헌신은 무의미해졌다. 대학가에선 교육부의 의대 학사 일정 특혜를 두고 분노가 터져 나온다. 의사 수만 늘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의대 증원은 끝이 아니다. 비급여 진료 통제 등 의료개혁 과제가 수두룩하다. 이번 면죄부는 정부가 개혁 행보를 펼치는 데 족쇄가 될 것이다. 의사들은 알고 있다. 그들이 가운을 벗으면 국가 정책은 손바닥 뒤집히듯이 번복된다는 사실을. 다음 수순은 국시 구제다. 데자뷔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지 않다. ‘의사 불패’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