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우석의 푸드로지 - 수육
삶은 고기 뜻하는 ‘숙육’서 파생
곰장어·아귀·복어 등 메뉴 다양
촉촉하게 수분 유지하며 기름 쏙
부드러우면서 담백한 식감 매력
한국에선 족발·보쌈이 대표 음식
日차슈, 中동파육도 비슷한 요리
올해 일찌감치 폭염을 예고하더니만, 6월이 되자마자 더웠다. 불판 앞에 앉기 망설여진다. 더위에는 우량한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을 권장하지만, 한낮 레이저 빔처럼 쏘아대는 땡볕에 시달리고 나면 뜨거운 숯불 앞은 생각만 해도 아찔해진다.
이럴 땐 수육이 제격이다. 수육은 고기를 삶은 것을 의미하는 ‘숙육(熟肉)’에서 나온 말이다. 미리 고기를 익혀서 나오니 직화 앞에 더울 리 없고, 한입 크기로 썰어서 나오니 일일이 자르고 뒤집고 하지 않아도 돼 번거로울 까닭도 없다. 내리쬐는 폭염 앞에선 최고의 메뉴 선택이다. 어쨌든 우리의 ‘삶’은 음식으로 유지된다.

삶은 고기라지만 보통은 돼지고기(삼겹살, 목살)를 먼저 떠올린다. 특히 김치 담그는 날 수육을 삶아 곁들여 먹던 문화에 익숙한 탓이다. 샐러드 격인 갓 담은 김치와 기름진 고기가 내는 그 궁합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막힌 환상의 조화다. 지금 식당에서도 으레 돼지고기 수육은 김치와 곁들인다.
하지만, 수육은 원래 거의 모든 종류의 식육이나 생선까지도 포함하는 말이었다. 당연히 소고기를 삶은 수육(양지나 사태를 주로 씀)도 있고 양고기, 흑염소 수육도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수육 하면 개고기 수육이란 단어가 익숙했던 시절도 있었다. ‘토끼를 잡고 나면 개를 삶는다’는 뜻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팽(烹)이 바로 수육의 조리과정을 형상화한 한자다. 모닥불 위의 솥처럼 생겼다.
단, 닭이나 오리 등 가금류의 경우엔 따로 백숙(白熟)이라 부른다. 닭수육이라 하지 않고 닭백숙, 오리백숙이라 한다. 하얀 숙육. 백숙이란 원래 고기나 생선 등을 물에 넣고 끓인 요리를 총칭하던 이름이다.
닭은 백색육이니 그렇다 쳐도 살점이 빨간색을 띠는 오리까지 백숙이라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실 오리는 살이 붉지만 불포화지방산을 많이 함유한 백색육의 범주에 든다. 그런 분류를 미리 알고 수육과 백숙을 구분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신통방통하게 맞아떨어진다.

생선도 수육이 있다. 놀랄 일이 아니다. 메뉴를 듣고 보면 꽤 익숙하다. 가끔 주변 식당에서 만날 수 있는 곰장어(먹장어) 수육, 아나고(붕장어) 수육, 아귀 수육, 복어 수육 등이 있다. 돼지고기 수육의 경우, 따로 제육이라고도 한다.
“선술집은 훈훈하고 뜨뜻하였다. 추어탕을 끓이는 솥뚜껑을 열 적마다 뭉게뭉게 떠오르는 흰 김, 석쇠에서 뻐지짓뻐지짓 구워지는 너비아니 구이며 제육이며 간이며 콩팥이며 북어며 빈대떡….”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에 주인공 김첨지가 친구인 치삼과 술을 마시던 선술집 안주 중 분명히 제육이 언급된다. 서민층이 안줏감으로 먹던 제육은 요즘 먹는 제육볶음이 아니라 돼지고기를 삶아낸 것이다. 돼지고기 두루치기처럼 고추장에 벌겋게 볶아낸 제육볶음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수육의 특징은 담백한 맛이다. 불에 굽지 않고 물에 삶았으니 상당 부분 기름이 빠지고, 따로 강한 양념 또한 없으니 담담한 맛을 낸다. 다만 기름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고 촉촉하게 삶아내는 것을 기술로 치니 어느 정도 기름진 맛을 내야 좋아한다. 그래서 삼겹살이나 목살(소고기의 경우 사태) 등 제법 지방층이 두툼하게 붙은 고기를 쓴다. 야들야들한 족발을 삶아 수육으로 먹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저 족발(足+발)이라 부르지만 정확히는 ‘족발 수육’이다.
가끔 편육(片肉)이란 말도 쓴다. 이게 또 뭐냐면 ‘얇게 저민 수육’(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한다. 하지만 일상에선 돼지나 소의 가죽이나 귀, 연골 등 대가리 부위 또는 족발 부위를 얇게 썰어 껍질 부위의 콜라겐과 함께 굳힌 ‘누름고기’를 부르는 이름으로 굳었다. ‘누른고기’ ‘눌린고기’라고도 부르는 편육은 일종의 육가공 젤리 식품이다. 일정한 모양새를 잡기에도 편하고 다양한 부위를 한 번에 맛보기에도 좋아 잔칫상, 제사상, 상갓집 음식 등으로 자주 낸다.

이런 육가공 젤리를 서양에선 따로 아스픽(aspic)이라 하는데 편육이나 족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수육의 범주에 들면서 따로 전문 분야를 차지하는 영역이다. 이 중에선 돼지머리 편육이 특히 익숙해 슈퍼마켓이나 재래시장, 편의점, 공원 매점 등에서 판매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 간편 메뉴다.
수육은 원초적 요리법이다. 그저 물에 넣고 삶기만 하면 되니 냄비(솥)를 발명한 즉시 생겨났다 할 수 있겠다. 수육을 삶으면 고기도 먹고 맛이 우러난 국물도 여럿이 요긴하게 쓸 수 있다. 국물을 좋아하는 습식(濕食) 문화인 한국인에겐 더없이 좋은 조리법이다. 그래서 육수를 내는 설렁탕집이나 냉면집엔 어김없이 수육이 있다. 원래는 국물을 내기 위한 과정에서 쓰고 남은 부산물이지만 늘 귀한 식재료가 고기였으니 수육 메뉴를 따로 비싸게 파는 것. 부산 돼지곰탕도 마찬가지 사정이다. 아예 수육과 국물을 같이 내는 수백(수육백반)도 따로 메뉴로 둘 정도다.
조리 과정이 단순하고 간단하니 세계 곳곳에 비슷한 방식의 요리가 존재한다. 중국 요리 중에 냉채는 고기를 삶아서 식힌 것이며, 완성된 모양새는 다르지만 동파육 역시 구운 다음 삶고 조리는 과정을 거친다. 물에 삶는 것을 가장 하찮게 여기는 프랑스에도 닭백숙과 비슷한 요리가 있으며, 물 대신 와인에 닭을 삶은 코코뱅(Coq au Vin)은 오히려 고급요리로 통한다.

연일 반복되는 무더위에 지친 몸에는 어디 시원한 곳에 들어앉아 수육 한 접시로 보양하면 당장 에너지를 얻을 듯하다. 역시 ‘삶은 고기’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 대양정
목포의 오랜 꼬리곰탕 전문점. 받아들면 황송할 만큼 성대한 꼬리 수육을 판다. 자작한 국물에 뜯어 먹기 편한 꼬리토막을 한가득 넣고 부추무침을 올려서 낸다. 오랜 시간을 두고 끓여낸 꼬리 수육은 살점이 부드럽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낸다. 진득한 국물의 꼬리곰탕도 맛있기로 소문났다. 전남 목포시 원형동로 53 1층. 5만5000원.
◇ 명인설렁탕
얼큰과 보통으로 따로 내는 설렁탕으로 유명한 집. 국내산 소고기 업진살, 사태, 양지 등을 섞은 수육을 진한 사골 국물과 함께 내는 수육백반도 있다. 보통은 소고기 수육이 돼지고기보다 질긴 감이 없지 않은데 이 집 수육은 다르다. 진한 육수를 가득 품어 살점이 팍팍하지 않고 혀로도 씹을 정도로 부드럽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로8길 43 1층. 1만9000원.
◇ 동해안
활아귀회와 수육을 파는 집이다. 서울에선 좀처럼 먹기 힘든 활아귀를 회와 수육으로 묶어서 파니 각각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넉넉히 채소를 곁들여 갖은 부위를 불판에 올리고 즉석에서 쪄낸 수육은 부드럽고 쫄깃하다. 아귀찜 특유의 매운맛을 꺼리는 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중앙로 1305-56 라페스타D동 112호. 7만 원.
◇ 필동면옥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름난 평양냉면집.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집인데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메뉴는 바로 제육. 돼지고기 삼겹살을 삶아 어슷어슷 썰어 차가운 상태로 내는데 존득한 비계 맛이 일품이다. 냉면에 곁들여 먹으면 선주후면이란 말이 무색하게 소주잔이 연신 비워진다. 아쉽게도 ‘반접시’ 메뉴는 사라졌다. 서울 중구 서애로 26. 3만 원.
◇ 소문난 왕족발
고양시청 앞에서 40년 가까이 족발로 명성을 모은 집. 손님과 배달주문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오전 일찍부터 삶아낸 앞다리 족발을 떨어질 때까지 파는데, 늦으면 벌써 떨어지고 없다. 한 점 먹어보면 껍질은 부들부들하고 속살은 촉촉하게 삶아내는 고난도 기술을 느낄 수 있다. 막국수도 새콤달콤하니 맛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로 61-1. 3만8000원(대), 막국수 6000원(소)부터.
◇ 이문설농탕
명실공히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노포. 개업한 지 무려 120년이다. 옛 방식대로 소머리와 마나 등 특수부위를 넣고 끓여내 일반 설렁탕보다 풍미가 강한 편이다. 마나는 비장(脾臟)을 뜻하는 우리말로 만하라고도 한다. 피 맛이 살짝 감돌아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 때문에 찾는 이도 많다. 얇게 썰어낸 마나와 양지, 사태를 수북이 내는 수육 메뉴가 있다.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38-13. 4만4000원. 마나수육 1만6000원.
◇ 합정옥
양지와 내포를 고아내는 이름난 곰탕집. 곰탕 파는 가게치곤 젊은 분위기다. 곰탕을 끓여낸 고깃덩이를 썰어낸 다음 따로 국물 자작하게 데워주는 수육 메뉴가 인기다. 불판이라 더운 감이 있지만 얇게 저며낸 수육이 국물과 어우러져 부드럽게 맛볼 수 있다. 배추속대를 넣어 끓여낸 메뉴 속대국도 유명하다. 서울 마포구 양화로1길 21 2층. 4만 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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