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성욱의 Deep Read - 수미 테리 사건이 남긴 것

한국 요원들 정보전의 ABC 안 지켜 큰 대가… 동맹 미국과의 정보협력 전반적 위축 우려
정보실패 거듭 땐 국격 추락… 요원 선발 정상화·어학능력 제고·활동행태 획기적 변화 기해야


수미 테리 사건은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아마추어리즘이 만들어낸 정보참사다. 이 사건은 특히 ‘정보실패’를 막기 위한 ‘비노출 간접활동’의 ABC를 지키지 않을 때 엄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교훈을 일깨워줬다.

◇국가정보학

인류의 역사는 정보활동의 역사다. 구약성서 민수기 13장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후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보낸 기록이 있다. 기원전 600년 중국의 손자병법에도 정보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13세기 칭기즈칸이 단시간에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비밀정보 활동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들어 유럽에 상주 대사 제도가 시행되면서 정보활동의 변화가 일어났다. 외교관 직함을 갖고 공식적인 외교와 비공식적인 정보활동을 병행했다. 대사관에는 비밀 정보 요원이 상주했으며 대사는 허가받은 스파이로 통했다. 절대 왕정국가들은 비밀조직을 설립해 국내외 정보활동을 전개했다. 특수기관을 설립해 해외 우편물을 은밀히 개봉하고 암호를 해독하기도 했다.

1·2차 대전을 치르며 열강들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정보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21년 영국의 비밀정보국(MI6)을 시작으로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 정보기관이 설립됐다. 인간정보와 함께 첨단장비를 활용한 기술정보 활동이 본격화됐다. 동시에 ‘국가정보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보활동에 대한 학문적 차원의 체계적 연구가 시작됐다. 2차 대전 중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에서 근무했던 셔먼 켄트가 1949년 발간한 ‘미국 외교정책을 위한 전략정보’는 현대 국가정보학의 효시로 평가된다.

정보 선진국들이 정보활동을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치명적인 정보실패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1962년 발간된 R 월스테터의 ‘진주만 기습: 경고와 정책 결정’은 미국 역사상 대표적인 정보실패 사례로 지목되는 진주만 기습을 규명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도 정보실패의 반면교사로 삼기 위한 논문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됐다. 국가정보학의 콘텐츠가 무엇으로 구성돼 있으며 선진 정보기관들은 이론과 실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정보실패

워싱턴과 서울의 정보가를 뜨겁게 달군 수미 테리 기소 사건 역시 그 원인과 교훈을 제대로 복기해야 더 큰 정보참사를 예방할 수 있다. 정보활동 이론·기법·첩보 수집, 정보 분석, 비밀공작, 방첩 등을 세부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첩보 수집의 주요 소스로는 인간정보인 휴민트와 기술정보인 테킨트 등이 있다. 인간정보를 수집하는 간첩의 영어 표현은 다양하다. spy, espionage, agent, source, the Fifth Column, fraktsiya 등이 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수미 테리 기소장에서 ‘handler(조종자)’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여러 단어가 사용되는 것은 그만큼 역할이 의미심장하고 위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보관들이 수미 테리를 직접 접촉해서 첩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인간정보다.

인간정보 요원들은 주재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신분을 공식 혹은 비공식으로 ‘가장(cover)’한다. 공식은 외교관이나 해외 공직 직함을 사용하는 백색(white) 요원이며, 비공식은 상사 주재원, 언론인 등으로 흑색(black) 요원이다. 전체 31쪽의 수미 테리 기소장에 따르면 FBI는 우리 국가정보원 요원들을 합법적인 명함을 사용하는 ‘공식 가장’으로 판단했다.

각국의 방첩기관은 외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원래 소속을 파악해 업무 방향을 가늠한다. 공식 가장을 사용하는 백색 요원이라도 주재국 정보기관들은 정보 요원들의 행태를 철저하게 감시한다. 상대국에서 백색 요원 자신의 진짜 신분과 활동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발상이다. 방첩기관의 감시망을 피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주재국에서 정보관이 첩보원과 직접 접선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제3국에서나 혹은 제3자를 통한 간접 접선이 안전하다. 그런 점에서 수미 테리와 한국 정보 요원이 수천 개의 CCTV가 돌아가는 워싱턴 한복판의 고급식당이나 쇼핑가게에서 만난 것은 미스터리다.

◇비노출 간접활동

정보원들이 자신의 활동 흔적을 없애는 것은 ‘비노출 간접활동’의 ABC다. 면세품 적용을 위해 신분을 등록하고 영수증을 챙기는 등 자신을 노출시키는 정보 요원의 행위는 이해하기 힘들다. 수미 테리 사건에서 정보관들의 부주의한 행태가 ‘상대국이 우방국이고 우리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있으니 감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마추어적 판단에서 비롯됐다면 정보실패를 넘어 정보참사에 해당한다.

FBI가 수미 테리와 정보관들을 도·감청하고 미행 감시한 것은 영상 및 통신을 활용한 기술정보에 해당한다. 지난해 미 정보기관들의 용산 국가안보실 도·감청은 신호정보와 전자정보시스템이 활용됐다. 수미 테리 사건을 계기로 다양한 논란과 부작용이 예상된다. 한·미 정보 당국 간 정보협력은 전반적으로 약화할 것이고, 한국 정보관들은 당분간 접촉 기피 대상이 될 것이다. 이달 사임한 정 박 미 국무부 부차관보 연루 가능성 때문에 한국계 전문가들의 활동도 위축될 것이다.

사건에서 교훈과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사달은 더 크게 반복된다. 우선 국정원 파견 요원 선발부터 정상화돼야 한다. 5년마다 정권이 교체되며 국정원 지도부가 바뀌니 요원 파견 선발의 기준도 흔들린다. 영어가 부실하니 워싱턴에서 한국계 인사만 만나는 일이 빈번하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과 철저한 훈련이 필수적이다. 국정원 입사시험 과목으로 과거 폐지된 국가정보학이 다시 추가돼야 할 이유다.

나아가 정보활동 방식과 행태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백주에 감시 시스템이 작동하는 현장에서 한국계 인사를 직접 만나 금품을 제공하고 디브리핑을 받는 구태의연한 방식은 주재국 방첩 활동에 100% 단속된다. 1996년 워싱턴에서 한국 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미 군사기밀 자료를 넘겨준 혐의로 9년간 수감생활을 한 로버트 김 사건이 이를 말해준다.

◇정보활동의 국격

2019년 이후 달라진 미국의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적용 방향을 연구하고, 이스라엘·일본 등 정보 일등국 정보기관의 고급 정보활동을 분석하는 일도 시급하다. 21세기 국익정보 시대에 정보활동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정보참사는 주재국에서 한국계 인사들을 어렵게 하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추락시킨다.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 용어 설명

‘국가정보학’은 국가정보기관의 정보활동과 국가안보·테러리즘 등을 연구하는 학문. 정보원은 인간정보(휴민트), 신호정보(시긴트), 기술정보(테킨트), 지리·공간정보(지오인트) 등으로 나뉨.

‘정보실패’는 정보력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국가적 재앙을 부르는 것. 알카에다에 의한 미국 9·11테러(2001년 9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2023년 10월) 등이 대표적 정보실패 사례.

■ 세줄 요약

국가정보학 : 인류의 역사는 정보활동의 역사. 선진국들이 정보활동을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치명적인 정보실패를 예방하기 위함. 수미 테리 사건은 한국 정보기관의 아마추어리즘이 만든 정보참사.

정보실패 : 정보원들이 자신의 활동 흔적을 없애는 것은 국가정보학에서 강조되는 ‘비노출 간접활동’의 ABC. 수미 테리와 접촉한 한국 요원들은 이를 무시한 것. 당분간 동맹 미국과의 정보협력이 전반적으로 위축될 것.

정보활동의 국격 : 정보실패는 주재국에서 한국계 인사들을 어렵게 하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추락시킴. 국정원의 해외 파견 요원 선발을 정상화하고 어학 능력을 제고하며 정보활동 방식과 행태의 획기적인 변화를 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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