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맙습니다 - 앤더슨 선생님 <상>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보석 상자를 발견했다. 이리저리 어루만지며 먼지를 닦는다. 뒷면에 ‘Handcrafted by Ansel Anderson’이라고 선명하게 박혀 있다. 오래전 앤더슨 선생님이 손수 제작해 보내온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어, 이게 여기 있었네.”
그분을 뵙는 듯 반가워 혼잣말을 했다. 상황 파악을 한 아들 녀석이 뺏어 들고는 이리저리 어루만지며 웅얼거린다.
“엄마, 그 선생님은 진짜 할아버지처럼 따뜻했어요.”
녀석은 하얀 눈길을 달려가 그분 댁에서 크리스마스 쿠키를 만들던 추억을 불러들인다. 병아리색 작은 알전구들이 크리스마스트리에 조롱조롱 조명을 밝힌 거실은 아늑했다. 미리 준비된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밀어 눈사람이나 천사, 강아지 모형의 틀로 찍어 놓으면 사모님은 그것을 오븐에 구워 주었다. 알싸한 생강 향이나 계피 향을 머금은 갓 구운 쿠키를 먹으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아들도 나도 그날의 아련한 추억 속에 빠져든다.
그분은 유학 시절 남편의 지도 교수님이었다. 육척 장신의 큰 키에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의 반 이상을 덮고 있어 만화 속의 ‘의로운 산적’ 같았다. 굵고 낮은 목소리는 산타 할아버지나 멋진 영화배우를 연상케도 했다. 구수한 농담도 잘해서 이웃집 아저씨나 아버지처럼 편안한 분이었다. 가정을 중시하는 그곳의 문화 덕택에 실 가는 곳에 바늘 가는 것처럼, 우리는 항상 어우렁더우렁 어울려 지냈다. 식사 모임이나 야외 나들이 같은 행사에도 늘 같이 다닌 것이다. 난생처음 카약을 타고 패들을 저으며 숲 사이로 난 물줄기를 흘러내리던 기억은 잠시 꿈이라도 꾼 듯 황홀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유학생 가족과 시간을 함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견문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다른 일이 있다고 해도 이혼한 줄 오해받는다며 데리고 가는 남편 덕에 나도 반은 그분의 학생이었던 것이다. 정 많고 온화한 성품의 선생님은 그렇게 각별한 애정으로 나까지 챙겨 주었다.
가끔 남편은 귀갓길에 가지나 주키니 몇 개씩을 들고 왔다. 선생님 댁 뒤뜰에서 가꾼 채소를 자신의 학생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신 것이다. 어느 여름날 선생님 댁의 정원에서 즐겼던 바비큐 파티도 마음속에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있다. 데이지가 수놓인 앞치마를 두른 사모님은 예쁜 테이블보를 식탁에 깔고 샐러드나 음료들을 세팅했다. 나는 사모님 뒤를 쫄쫄 따라다니며 음식을 나르고, 포크와 나이프 등을 가지런히 접시 옆에 놓았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그릴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우며 담소를 나누고, 가끔씩 껄껄 웃는 소리가 뜰 안에 너울거렸다. 선생님의 소소한 일상마저도 모두 가르침이었다고, 남편은 그때의 삶을 회상하곤 한다.
1986년 겨울, 지인 부부와 함께 올랜도와 디즈니월드 여행을 계획했다. 휴대폰 같은 소통 수단도 없던 때에 두 대의 자동차로 장거리 여행을 하겠다는 우리가 무모해 보였지 싶다. 며칠을 고심하던 선생님은 묵직한 무전기 세트를 구해다 주었다. 벽돌 반쪽 정도의 크기에 안테나가 길게 나와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것을 귀에 대고 서로의 위치나 목적지 등을 확인했다. 말끝마다 “Over, Over”를 외쳐대며 영화 속 주인공 흉내를 냈다. 때마침 불어닥친 눈보라(blizard)로 몇 번의 어려운 고비가 있었지만 무전기 덕택에 보름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분은 여행 내내 우리의 수호신으로 함께 다녔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용감했는지 무모했는지,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우리의 만용을 젊음이라는 애교로 해석해 주었을까. 그렇게 우리를 탄탄히 받쳐주는 바지랑대 같은 어른이었다.
변명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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