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란 소설가

예매 공들여 창가 좌석 앉았는데
젊은 승객이 블라인드 내리더니
무선이어폰 끼고 스마트폰 삼매경

작은 손전화기에 기쁨을 빼앗겨
나만 홀로 20세기에 던져진 느낌
풍경 욕심은 고답적 취미가 됐나


열차 여행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풍경에 흠뻑 빠지는 일일 것이다. 주말이면 열차를 타고 고향집에 다녀온다. 열차표는 한 달 전 예매를 개시하자마자 사두어야 한다. 깜빡 잊었다가는 놓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계획적인지 놀랍기 그지없다. 이런 연유로 십수 년 동안 열차표 예매에 공을 들여 왔다. 이 말은 예매에 성공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나름대로 약간 까다로운 조건이 있다. 우선, 반드시 창가 좌석이어야 한다. 하행과 상행의 열차 운행 시각에 따라 해가 어느 쪽에 있을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시야가 넓게 확보되는 자리를 차지해야 비로소 안심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도시에서 접할 수 없는 풍경을 실컷 보겠다는 기대 때문이다.

열차가 출발한다.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할 차례이다. 그런데 아뿔싸, 앞자리 승객이 단호하게 블라인드를 내려 버리는 게 아닌가. 직사광선이 드는 것도 아니고, 조금 있으면 요즘 그렇게 핫하다는 논 뷰가 펼쳐질 텐데 말이다. 나는 마음이 몹시 상하고 만다. 차창 하나에 좌석 두 개가 배치되어 있으니 적어도 뒷자리에 앉은 내게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보다 직사광선이 드는 게 아니라면 블라인드는 올려두는 것이 기본 아니던가?

마음은 상했으되 소심한 나는 그이만큼 결연하게 블라인드를 올릴 용기가 없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때마다 앞 좌석의 무정한 그이는 십중팔구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열이면 여덟아홉은 나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다. 이쯤에서 잠시 브레이크를 걸게 된다. 내가 꼰대가 된 것일까? 블라인드라는 건 이제 무조건 내려야만 하는 물건인가? 만약 그렇다면 열차의 창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게 낫지 않나? 아니, 아니다. 억울해서 어깃장이나 한번 놓아 보자는 것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상태로 목적지까지 갈 수는 없다. 앞사람에게 기척을 해서 블라인드를 반만 올려 보자고 말해 볼까? 내가 이 자리에서 창밖을 감상하고 싶어서 무려 한 달 전에 세심하게 고르고 고른 자리에 앉은 거라고 읍소해 볼까? 아니, 그건 너무 비굴해 보인다. 그도 동의 없이 블라인드를 싹 내려 버렸으니 나도 말없이 주춤주춤 올려 볼까?



그 순간 어디선가 알람이 울린다. 소리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울리고, 적어도 서너 차례를 반복한 다음에야 잠잠해진다. 그런데 아무도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너무 신기하다. 들은 사람은 정말 나뿐인가? 주변을 살펴보니 무선 이어폰을 꽂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쯤 되면 나만 20세기에서 갑자기 내던져진 사람인 것 같다. 초고속 열차의 승객이 아니라 통일호나 비둘기호쯤에 가서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비둘기호라니!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벌써 삼분의 일은 왔다. 빨리 와서 좋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전긍긍 갈등하는 사이 풍경의 삼분의 일을 놓치고 말았다. 산도 놓치고 강도 놓치고 논 뷰도 놓치고 밭 뷰도 놓쳤다. 겨울이면 마시멜로 같은 사일리지(silage)를 세어 보는 재미는 또 어떻고.

얼마 전 경남 통영에 다녀오면서는 버스를 탔다. 내가 탄 버스는 마침 프리미엄이라 1인 1창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이른 아침 내려가는 길에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지나 멀리 남쪽까지,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산세와 나무의 모습에 아주 넋을 빼앗기다시피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해는 졌고, 나는 풍경 대신 책에 빠질 계획이었다. 이제 네 시간 남짓 독서삼매경에 빠질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장거리도 기꺼웠다. 그러나 그것은 야무진 착각이었다. 좌석마다 설치된 개인 조명은 몇 번이고 스위치를 눌러도 켜지지가 않았다. 혹시 내 자리만 고장인가 했으나, 다른 자리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승객 대부분은 눈을 감았거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개인 조명은 그저 장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휴대전화는 어느새 신체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고 농담을 하곤 했지만, 정말이지 이건 너무했다는 서글픔이 몰려왔다. 바깥 풍경도, 책을 읽는 기쁨도 손바닥보다 작은 휴대전화에 모조리 빼앗기고 만 것이다. 실재하는 세계보다 기계 속 세계가 우리 생활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일까? 더 아름답고 더 중요해진 것일까? 어쩌면 이런 의문을 품고 당황하는 내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휴대전화 화면을 더 선명하게 보려고 블라인드를 꼭꼭 여미는 게 대세라면 말이다. 이제는 스펙터클한 화면을 두고 창밖 풍경을 욕심내는 자체가 고답적인 취미가 되어 버렸나 보다. 하물며 고속버스에서 책을 읽는 일이야 말해 뭣하랴.

이 서글픈 글을 다 쓰고 나면 산책을 나가려고 한다. 집 가까운 곳에 오리들이 헤엄치고 너구리가 출몰하는 소박한 개천이 있다. 그곳에서는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정겨운 꽃과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이름은 잘 모른다. 나도 물론 무슨 무슨 앱을 깐 후 휴대전화기의 렌즈를 들이대면 바로 이름을 가르쳐준다는 문명의 세계쯤은 알고 있다. 궁금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름을 알고 싶지는 않다. 무슨 고집인지 쉽게 알아냈다가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마뜩잖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 그것들은 이름 모를 나무, 이름 모를 꽃으로 이미 충분하다.

이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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