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8년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있을 때 그의 건강 상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 중견 언론인들의 만찬 자리에서 뜻밖에 고급 정보가 나왔다. 이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건강 상태가 어떠냐”는 언론인들의 질문에 “양치질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양치질할 정도면 반신불수 등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당시 고위 관계자의 언급은 이튿날 조간신문에 1면 톱기사로 나왔고 파급력이 컸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뒤 정보 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큰일 났다. 우리 정보망이 다 들통났다”며 이를 발설한 청와대 관계자를 성토했다. 김정일이 양치질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극히 일부이고 이런 정보가 남한 측에 흘러갔다는 것을 안 북측이 정보 유출자 색출 작업에 나섰다는 얘기다. 오랫동안 공을 들여 김정일 주변에 심어 놓은 이른바 ‘블랙 요원’의 신분이 탄로 난 것이다.
영화 ‘공작’으로 잘 알려진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특수공작원인 박채서 씨는 ‘흑금성’으로 활동한 블랙 요원이다. 원래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대북 공작관이던 박 씨는 안기부에 스카우트됐고, 1997년 6월엔 김정일 위원장까지 만났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5년에는 남한 톱스타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가 함께 등장한 남북 합작 광고 제작에도 관여했다. 박 씨가 수집한 안기부의 대선 공작 관련 ‘북풍 정보’는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측이 북풍을 막는 데 기여했다.
북한에 직접 침투하거나 국경 주변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목숨을 건 활동은 주로 군 정보사가 맡아서 한다. 대사관에 근무하며 신분이 알려진 ‘화이트 요원’과는 달리 블랙 요원은 은밀하게 활동한다. 그런데 최근 군 정보사령부 군무원의 노트북에서 블랙 요원과 전체 부대원 현황이 담긴 1급 기밀이 북한에 유출됐다고 한다. 정보사 요원 출신인 군무원은 해킹당했다고 하지만 수사 결과 중국 동포에게 건네졌고, 북한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 근무하는 블랙 요원들이 신분 노출을 우려해 귀국하거나 활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블랙 요원 1명 키우는 데 10년 이상 걸리는데 이번 사태로 궤멸 수준을 피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