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최근 정보 참사(慘事)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함께 간첩 개념은 물론 정보 활동 방식의 재정립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16일 미국 연방검찰이 중앙정보국(CIA) 북한 분석관 출신의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기소한 사건과 28일 국군정보사령부 군무원이 해외 첩보요원 명단 등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런 배경에서 조태용 국가정보원장도 29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간첩죄 적용 대상을 ‘적국(敵國)’에서 ‘외국’ 등으로 확대하는 형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실에 맞게 간첩죄를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형법 제98조는 적국을 위하여 간첩을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면서 군사상 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자도 같은 형으로 처벌토록 하고 있다. 이 조항은 1953년 9월 형법에 명시된 후 71년간 그대로다. 그 결과 그동안 심각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첫째, 현행 간첩죄에서 규정한 적국의 개념은 선전포고 또는 교전 상태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단속 및 처벌의 근거로 삼기엔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적국이 아닌 외국 정보기관의 간첩 활동이 당국에 포착되더라도 간첩죄로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둘째, 간첩죄의 적용 대상이 ‘적국을 위한’ 행위로 한정돼 있다. 그 결과 군사·방위산업 기밀 등을 우호 관계에 있는 외국에 유출하더라도 간첩죄 적용이 곤란하다. 지난 2018년 국군정보사령부 공작팀장이 일본과 중국에 군사기밀 100여 건을 팔아넘겼을 때 이들 나라가 적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했다. 그런 탓에 징역을 4년만 선고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제3국 기업에 중요한 기술정보를 넘긴 이른바 산업 스파이의 경우에도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한다. 2018년부터 5년간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로 인한 피해액이 25조 원에 이르지만, 처벌은 솜방망이(실형 선고 9명, 무죄 선고 29명, 집행유예 36명)였다는 언론 보도도 있다. 이는 핵심 기술 보호가 국가안보는 물론 국익 수호 차원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포괄적 안보의 국제 환경에 맞지 않는다. 미국을 비롯해 독일과 프랑스 등 대다수 국가는 자국에 해(害)가 되거나 타국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자에 대해 간첩죄를 적용해 중형에 처한다. 이는 적국이 아닌 동맹국이나 우방국에 산업 기밀을 유출한 때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미국은 1996년 경제간첩법(Economic Espionage Act)을 제정해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지금 세상에서는 간첩의 활동 범위가 온·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계속 확산되고 있다. 일반인도 얼마든지 간첩 행위를 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도 OECD 회원국 중 간첩죄를 적국에 한정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시대착오적인 법 조항 때문에 국가안보와 국익 수호에 구멍이 뚫렸다. 이를 알고도 방치하는 건 반(反)국가요, 무능력·무책임의 소치다. 제22대 국회는 ‘외국과 외국인단체 및 비국가행위자(국적 없는 해커 포함)의 간첩 활동’도 처벌할 수 있도록 속히 간첩죄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 간첩 섬멸에 여야가 따로 놀아선 안 된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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