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끓는 마음 달래려 찾은 절집 늘 ‘나는 누구인가’ 궁구하던 삶 스님 “이참에 마음 비워보시죠”
템플스테이는 쉼·멈춤의 기회 피폐해진 몸도 마음도 되찾고 다시 살겠다는 의지 세우는 일
어느 해인가, 여름 며칠을 템플스테이를 하며 보낸 적이 있다. 한 잡지에서 템플스테이를 한 뒤 체험기를 적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절에 연락을 하고 뭘 가져가야 할지 물었다. 내 전화를 받은 스님은 걱정이나 근심을 내려놓고 책이나 개인 컴퓨터도 갖고 오지 말라고 일렀다. 오직 빈 몸만 내려오시라! 속옷 몇 가지만을 챙겨 절을 찾은 날도 날씨는 습하고 무더웠다. 하지만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볼 만했다.
황망하게 출판업을 정리하고, 전업 작가로 살리라 마음먹고 장서 2만 권을 싣고 시골로 이사했다. 밤에는 고라니가 울고, 낮엔 먼 산에서 뻐꾸기가 한가롭게 우는 저수지를 낀 시골 마을에 이삿짐을 풀었다. 당장에는 생계 대책도 없었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마을에서 마음의 가난을 품고 살고자 했건만 분노와 자기 연민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마음은 들끓고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골에 묻혀 사니, 찾는 사람도 원고 청탁도 끊겼다. 살림은 나날이 팍팍하고, 연애는 깨졌다. 노자의 ‘도덕경’이나 선(禪)과 위빠싸나 명상에 관한 책들을 붙들고 묵상을 하면서 지옥 같은 마음을 달래던 그 무렵 템플스테이 제안을 받은 것이다.
템플스테이를 위해 찾은 절은 산속에 있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 만한 유명 사찰이다. 단청은 낡아 색깔이 바랬으나 고즈넉한 대웅전 앞마당은 누군가 비질을 했는지 깨끗했다. 젊은 스님의 안내로 들어간 방에서 절집 옷으로 갈아입고 템플스테이에 관한 주의 사항을 들었다. 주로 공양, 묵언 수행, 새벽 예불에 관한 것이다. 젊은 스님은 말을 마치고 “이참에 마음을 비워 보시죠” 하며 미소를 짓고 사라졌다. 나는 덩그러니 남겨진 채 비운다는 것은 무엇일지를 곱씹어보았다.
템플스테이는 일정 기간 출가자와 같은 방식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일절 말을 끊고, 문자를 읽는 행위도 멈추었다. 그건 내 속에 숨은 나를 만나려는 의식이다. 오직 찰나에 의식을 집중하려는 내 눈앞의 방은 넓었다. 텅 빈 방! 어떤 기물도 없이 텅 빈 그곳에, 어디에나 있는 텔레비전이나 퍼스널 컴퓨터 따위는 없었다. 서창으로 뉘엿뉘엿 지는 해의 그림자가 비칠 때까지 벽을 마주한 채 아무 생각도 없이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잡념들이 밀물로 흘러왔다가 다시 썰물로 빠져나갔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한동안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가난의 누추함에서 벗어나 좋은 차를 타고 고전음악이나 들으며 우아하게 살고 싶었다. 출판 사업에 뛰어들어 성과를 거두었지만 늘 결핍을 느꼈다. 불행의 깊은 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잉여를 배제한 삶, 궁극의 필요에만 부응하는 게 내 이상이지만, 그건 요원한 일이었다. 지팡이와 흙으로 빚은 물컵 하나를 갖고 떠돌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같이 사는 일은 불가능했다. 나는 담요와 베개 하나, 숟가락과 밥그릇, 면양말과 속옷, 신발 한 켤레로 자족할 수 없었다. 나는 무소유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지만, 현실에서는 늘 넘치는 물건들에 치인 채로 산다.
오랫동안 나는 무엇일까를 궁구하며 살았다. 나는 새도, 네 발로 기는 동물도, 공중에서 붕붕거리는 말벌도 아니다. 맨드라미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이다. 너른 방의 어둠 속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나’라는 백일몽, 혹은 집착과 욕심의 덩어리다. 그리고 어둠은 모든 존재의 시원(始原)이다. 생명이 가진 개체는 다 어둠에서 나와 살다가 죽은 뒤 다시 어둠으로 가뭇없이 사라질 테다. 우리는 어둠과 어둠 사이에 반짝하고 빛나다가 사라질 무(無)다. ‘나’라는 존재는 한 줌의 빛과 어둠, 공기로 지어진 소슬한 집 한 채일 뿐! 애초에 없던 그 무엇, 숨 쉬고 활동하는 무, 분주하게 순환과 혼합을 하던 삶을 멈추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환원하는 무!
템플스테이 사흘째 정오쯤, 절에서 가까운 숲속에 들어가 아름드리나무를 끌어안았다. 녹색 향연이 한창인 숲속에서 이마에 닿는 공기는 차가웠다. 귀에 들리는 건 오직 새소리와 바람 소리뿐. 팀 잉골드는 “나무들의 현존을 마주하고 있으면 분명 살아 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생생해진다”고 말한다. 숲속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여름 숲속은 가지를 뻗고 잎사귀를 피워낸 나무들로 깊고 어둡다. 나무들은 산소를 뿜어내며 바람이 불 때마다 연신 살랑거린다. 나무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나무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에 의식을 집중한다. 닫힌 백회혈(百會穴)이 열리는 느낌. 그 열린 백회혈을 타고 낯선 기운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해 여름 며칠을 절에서 보냈다. 템플스테이는 쉼, 멈춤, 자기 회복의 기회이다. 누군가에게는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되찾고 다시 살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했던가? 아마 그랬을 테다. 어떻게 사랑 없이 살 수 있겠는가? 여름이 다시 돌아오고 마음이 시끄러우니, 내 안의 갈애(渴愛)와 타는 목마름들이 소용돌이치며 나를 가만두지 않고 괴롭힌다. 그해 여름 템플스테이를 하고 들끓는 마음에 휴식을 주며 고요하게 지낸 절집이 그리워진다. 그 절집 숲속의 울울창창한 나무들은 생명의 기운으로 생동하고, 매미들은 진종일 극성스럽게 울어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