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의대 증원 불가역 상황 필수·지역의료 회생 기반 마련 개혁 필요에도 의대 쏠림 문제
초중고대학 의대 광풍 휩쓸어 과학기술 인재 부족·유출 심각 국가 인재육성 종합대책 시급
지난 2월 6일 의대 2000명 증원 발표로 시작된 윤석열 정부의 의료 개혁이 반환점을 돌았다. 2025학년도 1500명에 달하는 의대 증원은 ‘불가역’적 상황이 됐다. 1997년 이후 27년 만에 처음으로 증원이 이뤄진 것이다. 의사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역대 어느 정부도 성공하지 못한 의대 증원을 관철한 것만으로도 일단 성공이다. 증원을 통한 의사 공급 확대, 필수·지역 의료 살리기를 위한 필요조건은 구축됐다.
2월 말 의대 증원에 반발해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 1만여 명과 동맹 휴학으로 강의실을 떠난 의대생 1만8000여 명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의대 교수들과 대한의사협회도 여전히 정부에 반기를 들고 있다. 현 단계 의료 개혁을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직 전공의들은 온갖 유화책에도 요지부동이다. 의대생들은 의사 국가고시를 거부했다. 당장 내년도 전문의 배출에 차질이 생기고, 내년에 7000명이 넘는 의대 1학년 수업은 부실 교육 우려가 적지 않다. 수술·외래 감소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상급종합병원들을 중증 치료에 주력하는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바꾸려면 건강보험 재정뿐 아니라 막대한 예산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급격한 의대 증원에 따른 이런 후유증에도 의료 개혁이라는 큰 방향을 되돌릴 수는 없다.
더 큰 문제가 의대 증원과 함께 배태됐다. 인재들이 의대로 쏠리는 ‘망국병’ 증세가 악화하고 있다. ‘초등생 의대반’의 조기 교육 열풍이 넘친다. 이는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강남구에 유입되는 초등생 숫자 1위라는 결과를 낳았다. 의대 지역인재 전형 확대에 따라 충청권 등 지방 유학 바람도 분다. 종로학원은 최근 2024학년도 자연계열 수시모집 내신 합격 점수 1.06등급 이내 125명 전원이 의약학 계열에 진학했다고 발표했다. 의대 쏠림은 기초과학 등 이공계 인력 유출을 부추기고 있다. 대기업이 지원하는 대학 첨단 반도체 학과 등에서는 의대에 중복 합격한 학생들이 이탈했다. 올해 서울대 첨단융합학부, 자연과학대 등 이공계 1학년 학생 248명(1학년 전체의 7.2%)은 반수를 하기 위해 휴학했다. 카이스트 등 이공계 특성화대 신입생들도 의대 진학을 위해 줄줄이 등록을 포기했다. 전방위적인 인재 쏠림으로 불릴 만하다. 환자 목숨을 담보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의사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내 자녀는 의대를 보내겠다는 이중 심리가 만연한 탓이다.
의대 광풍으로 반도체, 인공지능(AI), 2차전지 등 첨단 기술과 기초과학 인재 부족 문제 또한 심각하다. 지난 6월 열린 한 토론회에서 2028년까지 과학기술 분야 신규 인력이 4만7000명 부족할 것이라는 분석 결과도 제시됐다. 대기업 임원들은 첨단 분야 이공계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호소한다. 그나마 있는 인력도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파격적인 연봉 제안에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 올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여파로 젊은 과학자들의 연구비 신청 탈락이 속출하면서 이공계 인재들의 절망감은 깊어졌다. 이공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저하, 미래에 대한 불안감, 양질의 일자리 부족으로 이들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의사 면허증만 있으면 정년 없이 평생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비교 우위가 보이는데 이공계 인재들에게 사명 의식을 갖고 연구해 달라고 설득하기도 쉽지 않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는 “인재 불균형을 극단적으로 심화시키는 재앙적 사태의 시작”이라고 경고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최근 한 간담회에서 4대(교육·노동·연금·의료) 개혁 중 우리 사회의 경제·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교육 개혁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극심한 경쟁 압력 완화, 사교육비 절감, 창의력을 배양할 교육 시스템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국가 존망과 관련된 미래 경쟁력을 훼손하는, ‘저출생·고령화급’ 쓰나미와 다름없는 인재 불균형 문제를 풀기 위한 교육부의 절실함은 보이지 않는다. 관련 부처들이 종합 대책을 내놓은 적도 없다. 첨단 기술과 과학 인재들에게 최고 대우를 해주는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공계 살리기를 포함한 범국가 인재 육성 정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