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Global Focus - 75주년 제네바협약 유명무실화
부상군인·포로·민간인 등
‘전쟁 중 인도적 조처’ 명시
유엔보다 많은 196國 가입
러·이, 대놓고 협약 위반
우크라 포로 총살 당하고
가자주민 80% 난민 전락
“강대국 분쟁 갈수록 격화
제네바협약 소멸될 수도”
전쟁에서 민간인과 포로의 안전을 담보하는 제네바협약이 오는 12일로 체결 75주년을 맞는다. 오랜 기간 전쟁 속에서 민간인 보호를 위한 저지선으로 작동해 왔던 제네바협약은 최근 2개의 전쟁 악화로 힘을 잃어가고 있다. 러시아와 이스라엘이 민간 지역에 공습을 가하는 등 협약을 대놓고 위반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으로 국제사회에서 힘의 논리가 커지면서 제네바협약이 더욱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참혹한 전쟁 참상을 본 앙리 뒤낭의 제안으로 탄생…4개 협약이 뼈대 = 제네바협약은 스위스 사업가이자 대부호였던 앙리 뒤낭의 제안에서 유래됐다. 뒤낭은 1859년 6월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전쟁 당시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전장에서 3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 참상을 본 후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책을 쓰며, 전쟁 피해에 따른 국제법규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1863년 ‘전쟁 중에도 자비를’이란 기치하에 국제적십자사가 창설됐고 이듬해인 1864년 전쟁 희생자의 보호에 관한 조약이 만들어졌다. 이후 이 조약 등을 포함해 1949년 8월 12일 제네바에서 총 4개 협약이 채택되면서 제네바협약이 탄생했다.
제네바협약은 전쟁 중 포로와 민간인에 대한 인도적 대우에 초점을 맞춘 국제법이다. 4개 협약은 크게 △육상전에서의 군대의 부상자 또는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1협약 △해상에서의 군대의 부상자·병자 및 조난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2협약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3협약 △전시에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4협약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 규모는 429개 조문과 11개의 부속서로 이뤄져 있으며, 성문화된 전쟁법규의 80%가량을 차지한다. 협약 가입국은 196개국이다. 유엔 회원국(193개국)보다 더 많은 나라가 동참한 셈이다. 한국은 1966년 8월 16일 자로 제네바협약에 가입했다.
◇포로·민간인 보호 규정 대놓고 무시하는 러시아…우크라 포로 상대로 성적 고문·총살 등 만행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포로를 상대로 만행을 저지르며 제네바협약을 유명무실화하고 있다. 지난 3일 드미트로 루비네츠 우크라이나 의회 인권위원장이 “러시아군들에 의해 머리와 팔다리가 잘린 우크라이나 포로 시체 사진이 온라인에 떠돌고 있다”고 밝혀, 우크라이나 검찰이 수사에 돌입했다. 이에 앞서 유엔 조사위원회도 보고서를 내고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우크라이나 포로 최소 32명이 처형됐다”며 러시아군이 조직적으로 우크라이나 포로들을 성적으로 고문했다는 증거도 추가로 수집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지난해 3월에는 생포된 우크라이나군이 “우크라이나에 영광이 있기를”이라고 말하자 러시아군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총살당하는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러시아는 부인 중이지만, 사실일 경우 제네바협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제3협약에는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는 물론 포로의 안전보장을 위한 조치 등의 사항이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포로의 신체에 어떠한 학대도 가해져서는 안 된다.
러시아가 민간인 보호를 규정한 제4협약을 위반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달 44명이 사망한 우크라이나 어린이 병원 피격 사건의 가해자로 러시아가 유력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순항미사일 파편을 증거로 러시아의 공격이라는 입장인 반면, 러시아는 노르웨이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방공시스템 미사일이 병원을 타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이다. 유엔 우크라이나 인권감시단이 “영상 분석과 사건 현장에서 이뤄진 평가에 따라 어린이 병원 피격은 방공 미사일에 의한 피해보다는 직격탄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혀 러시아의 직접적인 폭격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가자지구 주민 80%는 난민으로 전락…중·러 위협에 서방서도 외면받기 시작한 제네바협약 = 가자지구에서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도 제4협약 위반국으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발발한 전쟁 이후 가자지구 주민 230만 명 중 80%가 난민이 됐으며, 사망자 3만8000명 중 약 70%가 여성과 아동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지난해 11월 하마스의 지휘소가 있다며 가자지구 내 최대 규모의 알시파 병원을 폭격해 논란을 키웠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병원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제 제4협약에 따르면 전쟁 중 병원은 보호돼야 하지만 군사 시설로 이용됐을 땐 예외가 적용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제4협약에 포함된 비례성의 원칙을 간과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프랑스 리옹 3대학의 마틸드 필립 게이 교수는 “대응은 상대의 행위에 ‘비례하는’ 수준이어야 한다”면서 “(병원에) 이틀 동안 공격을 퍼부어 대고 완전히 파괴할 권리는 없다”고 했다. 병원이 군사 목적으로 이용됐을 경우에도 공격에 앞서 사전 경고하고 환자와 의료 종사자를 위한 대피 절차를 제공해야 하는데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2개의 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제네바협약이 최근 격화하는 강대국 간 분쟁에 더욱 유명무실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과 러시아가 갈수록 제네바협약을 무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도 이를 이유로 자국만 제네바협약을 준수하기는 어렵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찰스 페데 미 육군 예비역 중장은 “미군이 (제네바협약으로 인해) 교전 규칙에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다”며 “이러한 제한이 러시아 또는 중국과의 전쟁에 적용된다면 참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이 자칫 제네바협약의 소멸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이현욱 기자 dlgus300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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