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립습니다 - 나의 아버지 시조시인 월하 이태극(1913∼2003) <하>하>
‘시조문학’ 창간이 1960년이고 계간으로 바뀐 것이 1974년이니까 초창기에는 시조시인의 수가 적었고 지면에 실을 작품의 수도 부족했다. 시조 창작을 활성화해 보겠다는 생각에 신인 추천 제도를 두어 신인을 배출했고 일반 독자들의 작품도 가리지 않고 게재했다. 요컨대 시조라고 이름 붙은 것이면 전부 ‘시조문학’에 끌어들여 문학지의 명맥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자 ‘시조문학’은 잡초를 양산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한 비판에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시조문학’이 자진 폐간해 사라졌다면 시조 단에 과연 좋은 결과가 나타났을까?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이렇게 험한 소리를 들으면서 무엇 때문에 돈을 들여 시조 잡지를 내느냐고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며, 그래도 누군가는 우리 고유의 장르인 시조를 살려서 국민에게 보급해야 하지 않느냐고, 일본의 하이쿠처럼 국민이 저마다 시조 한 수쯤은 지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이왕 시작한 일이니 끝을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노쇠의 길로 접어들면서 86세 되는 1998년에 ‘시조문학’ 출판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셨다. 1999년 3월 뇌경색 진단을 받아 한 달 넘게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했는데 보행과 언어에 지장은 없었으나 정신은 예전 같지 않았다.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고 걱정하셨는데 그것은 오직 다시 시조를 쓰기 위해서였다. 모처럼 시조 원고 청탁을 받고 작품을 써 보려 하셨지만 한 행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마지막 기억은 시조만을 향해 열려 있었다.
요양병원으로 모신 후에는 가까운 친척도 잘 알아보지 못했다. 2003년 봄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기억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거의 매일 병원에 방문했는데 어느 날은 나를 알아보셨고 어느 날은 그러지 못하셨다. 마흔셋에 낳아 오십 년을 함께 산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시다니. 개나리 피어나는 병원 뒤뜰에서 나는 숨죽여 울었다. 소월의 시 ‘금잔디’가 저절로 떠올랐다.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은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버지의 기억력을 돋우기 위해 “‘청산리 벽계수야’ 아세요?” 했더니 더듬으시기는 했지만 끝까지 암송하셨다. ‘태산이 높다 하되’도 끝까지 암송하셨다. 혼미해 가는 정신 속에서도 시조만은 끝까지 붙들고 계셨다. 나는 사재를 쏟아 문학지를 간행하고 ‘정지용 시집’과 ‘영랑시집’을 낸 박용철을 생각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아버지는 결국 세상의 손을 놓으셨다. 아버지가 하신 일의 문학적 가치를 늦도록 인정하지 않았던 나는 뒤늦은 회한에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영결식장에서 자괴감이 북받쳐 울먹이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1930년대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을 간행한 박용철이 없었다면 김영랑이나 정지용 등 시문학파의 성립이 가능했겠습니까? ‘시조문학’은 시조시인 육성에 있어 ‘시문학’을 능가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중에 ‘이태극 시조 전집’(2010)을 내면서 “아들로서 불효하고 불민한 일들이 연이어 떠올라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다”라고 한 것도 바로 그것을 고백한 것이었다. 만득(晩得)의 외아들보다 시조를 더 사랑하신 아버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시조를 지으시면 온 가족을 모아 놓고 흥에 겨워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셨다. 지금 저세상에서도 당신께서는 변함없이 시조를 짓고 암송하고 누군가에게 시조를 이야기하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숭원(문학평론가·서울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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