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범 산업부장

中 완성차 10년 내 세계 1·2위
CATL 순익·투자도 韓 3사 압도
칩 공장건설 韓 8년, 美·日 3년

첨단산업 ‘붉은 여왕 가설’ 지배
진화 속도 상위 10% 생존게임
규제 혁파로 산업 DNA 살려야


‘한국 경제의 미래는 과연 밝은가’. 문화일보가 ‘대한민국 ABC가 위험하다’는 연속 기획을 진행하면서 던진 물음이다. 한국 경제의 핵심 엔진이자 수출 주역인 A(auto·자동차)와 B(battery·2차전지), C(chip·반도체) 산업의 겉모습은 호황기 수준을 상당 부분 회복해 가는 것처럼 비친다. 이들 산업의 성장세 덕분에 월별 수출 증가율은 지난 7월만 해도 전년 동기 대비 13.9%를 기록하는 등 10개월 연속 ‘플러스 행진’을 이어갔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여지없이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을 보는 듯하다.

지금은 전기차 화재 사고와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으로 인해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자동차의 전동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 요구다. 이 흐름을 맨 앞에서 주도하고 있는 국가는 다름 아닌 개발도상국으로만 여겨온 중국이다. 중국은 내연기관차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전기차에 올인하는 전략으로 판을 흔들고 있다.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 4대 브랜드의 합산 점유율은 올 들어 40%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치솟고 있다. 세계 완성차 시장을 주도하는 테슬라·폭스바겐·스텔란티스·BMW·메르세데스벤츠·현대자동차·기아 등의 점유율을 다 합해도 30% 초반에 그친다. 이런 상태라면 향후 10년 안에 전기차와 내연기관차를 합친 전 세계 완성차 시장의 1·2위 자리는 중국 브랜드가 차지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중국의 2차전지 시장 잠식 속도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 반도체가 ‘치킨게임’을 통해 세계 메모리 시장을 평정했던 신화 재현에 가까이 다가간 형국이다. 과거 한국 반도체는 값이 폭락해도 상대가 백기 투항을 할 때까지 적자를 감수한 채 공급 확대 기조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최후의 승자가 독식하는 초격차 시장을 만들었다. 실제 값싼 배터리라고 치부해 온 중국 선두 업체인 CATL은 세계 전기차 시장의 약 40%를 차지하는 자국 시장을 발판 삼아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시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최근 중국 후발 업체 파라시스의 배터리가 장착된 벤츠 전기차 화재 사고가 인천에서 발생해 중국산에 대한 불신이 커졌지만, CATL의 기세는 쉽사리 꺾이지는 않을 전망이다. 질적 성장과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순이익과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를 비교하면 CATL 한 회사의 성과가 K-배터리 3사의 총합을 압도한다.

반도체 사업의 성패는 대규모 첨단 공정을 얼마나 빨리 구축하고, 오랫동안 시장을 독점하며, 지속해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차세대 공장 건설 속도는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최대 관건 중 하나다. 문제는 속도전에서 우위를 점해온 K-반도체의 경쟁력은 갈수록 무색해지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2∼3년 만에 공장을 가동하는 데 비해 각종 인허가 규제와 지역 민원 등에 발목이 잡힌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은 차세대 반도체 생산단지를 건설하는 데 기본적으로 8년이 걸린다. 대만 TSMC가 일본 구마모토(熊本)에 약 12조 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2년 4개월 만에 준공, 가동한 것과 비교하면 6년 이상 허송세월하는 셈이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ABC 산업만큼 ‘붉은 여왕 가설’이 지배하는 분야는 없다. 미국 시카고대 생물 진화학자 밴 베일런 교수는 논문 ‘새로운 진화 법칙’에서 ‘더 빨리 진화하는 상위 10%의 생명체만 살아남고 나머지 90%는 도태한다’는 붉은 여왕 가설을 발표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론이다. 소설 속 붉은 여왕이 지배하는 나라는 제자리에 멈추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뒤로 밀려난다. 계속 달려야 제자리를 지킬 수 있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두 배로 속도를 높여야 한다.

1991년 소련 해체에도 불구하고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라는 낡은 관념에 사로잡힌 채 기업을 옥죄는 규제만 양산하는 정치권과 ‘규제 혁파’ 구호만 요란한 채 보신주의에 젖은 공직사회가 대한민국을 ‘거울의 나라’로 만들고 있다. 가설대로라면 한국 기업 중 90%는 도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제22대 국회는 정쟁을 멈추고 속도전에 강했던 한국 산업의 DNA를 살릴 수 있는 인허가 패스트트랙 특별법과 한국형 생산 세액공제제도 등을 서둘러 도입해야 할 것이다.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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