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던 배터리 제조사 공개 당연 ‘배터리의 뇌’ BMS까지 확대를 근거 없는 땜질 대책 불안만 키워
정부 인증제·이력제 실효 의문 안전·품질 우수한 한국엔 호기 소비자 신뢰 높여 캐즘 넘어야
국내에서 판매되는 전기차에 장착된 배터리 제조사가 모두 공개됐다. 현대차·기아를 필두로, 문제의 인천 화재가 발생한 벤츠, 국내 판매 1위 테슬라까지 14개사가 정부 정책에 동참했다. 당연한 결과다. 영업비밀 노출이 우려된다고 해도 소비자의 안전 강화가 먼저다. 사실 일부 외국 업체가 미국·유럽에선 최고 품질의 배터리를 쓰고, 국내에선 저가·저품질 배터리를 쓰며 차별한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실정이다. 중국 업체 1·2대 주주인 벤츠가 하필 문제의 전기차에 세계 하위권인 중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사실을 두고 뒷말이 없지 않다. 꼼수가 아니라면 공연한 의심은 터는 게 마땅하다.
여기서 그쳐선 안 된다. 정부와 산업계 모두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같이 핵심 기술이 담긴 안전장치까지 공개 대상을 더 확대해 소비자에게 알려야 한다. BMS는 배터리 전류·전압의 변화·온도·순간 미세 합선(단락) 등을 체크하는 첨단 기술로, ‘배터리의 뇌’로 불린다. 그런 만큼 선두권 업체일수록 공개를 꺼리지만, 소비자 요구에 따르는 것은 의무다. 화재의 여파가 심각하기에 더욱 불가피하다. 전기차 포비아(공포) 확산으로 아파트 지하주차장 이용을 놓고 주민 분쟁이 벌어지고, 여객선들까지 선적을 기피하는 정도다. 전기차가 기피 대상이 된 셈이다. 안전 입증이 관건이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뜬금없는 규제가 잇따른다. 서울시가 90% 충전 이하만 지하 주차를 허용하고, 충전시설을 지상화한다는 게 대표적이다. 지하주차장 출입금지는 화재 발생 때 열 폭주로 불이 커지는 것을 막는 차원이지, 화재를 막는 근본 대책이 못 된다. 오죽하면 현대차·기아가 ‘100% 완충’도 안전하다는 발표까지 했다. 이미 3중 안전장치가 돼 있다는 것이다. 배터리 제조업체는 제작 단계, 자동차 업체는 차량 탑재 단계에서 각각 충전 여유분(마진)을 두기 때문에 계기판에 충전 100% 표시가 떠도 실제 완충은 없다고 한다. 또 BMS로 배터리 사용 가능 용량을 재산정하고, 화재 위험이 있으면 차량 소유자에게 안내도 한다. 전문가들은 배터리의 양극이 불량 또는 외부 충격으로 내부에서 합선할 때 화재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전기차 화재 위험이 유난히 높은 것도 아니다. 화재 발생률이 0.013%로, 하이브리드차(0.002%) 휘발유차(0.006%)보다 높지만, 경유차(0.015%)보다는 낮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마녀사냥식 규제는 불안을 조장해 모두에 더 큰 피해를 줄 뿐이다.
이제까지의 정부 대응도 너무 안이하고 부실했다는 사실 역시 어김없이 드러났다. 전 정부 때부터 보급에만 치중하고 안전엔 소홀했다. 54만 대 이상의 전기차가 보급됐지만, 화재 위험을 줄일 전력선통신(PLC) 모뎀이 장착된 완속 충전기가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뒷북 행정, 늑장 대책이다. 지난 25일 고위당정협의회에서 앞당겨 시행키로 한 배터리 안전 인증제나 이력제 등도 실효성이 여전히 의문이다. 당정이 곧 발표하겠다는 종합대책은 안전장치 강화 등 화재 예방은 물론 화재 소방법까지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침체) 시기다. 전기차·배터리 제조업체부터 양극재 등 소재업체들까지 고전 중이다. K-배터리는 중국의 맹추격을 당해 이미 글로벌 1위를 내줬다. 돌발적인 화재로, 침체가 더 길어질지 모를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한국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전기차는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추세다. 공포를 넘어 옥석 가리기가 활발해질 게 분명하다. 안전하고 품질 좋은 K-전기차·K-배터리의 우수성을 알릴 좋은 기회다. 중국에선 전기차 화재가 하루에 1대꼴이라지만, 현대 전기차는 이제껏 한 건도 없다고 한다. 부실한 중국 통계의 전모가 드러나면 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희망적인 조짐이 보인다. 올 1∼7월 현대차그룹의 미국 시장 전기차 점유율은 포드·GM을 제치고 테슬라 다음의 2위로 두 단계 올라갔다. 외신들은 가성비·전비(연비)를 높이 평가한다. 여기에 소비자 신뢰를 더 키우면 캐즘을 넘을 돌파구를 만들 수 있다. 이번 사태에서 현대차·기아가 정보 공개에 앞장선 것은 잘한 일이다. 수요 변화에 선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소비자와 업계가 상생하는 길인 동시에 도약으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