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교 편집국 부국장

원자력협정 협상 5개월 실랑이
前文에 재개정 요구권 명문화
이젠 日 수준의 권한 요구해야

한국 독자 핵무장은 비현실적
막 내리는 값싼 한미동맹 시대
분담금 더 내고 반대급부 확대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나요?”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그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대신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2015년 6월 한미 원자력협정 타결 당시 문구 하나를 집어넣기 위해 5개월 동안 실랑이 벌였던 일화를 이어갔다. 결국, 그 문구는 협정 전문에 들어갔다. ‘각 당사자의 주권에 대한 침해 없이(without prejudice to the sovereignty of each party)’였다. “협상에 관여했던 그 미국 측 인사가 제게 ‘가장 터프한 협상가’라고 말하더군요.” 지난해 가졌던 윤 전 장관과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얘기다.

한미동맹은 3개의 기둥으로 지탱된다. 1953년 상호방위조약, 1974년 원자력협정, 그리고 2012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유효기간이 41년이었던 원자력협정은 2011년에 재협상을 시작했다. 난제 중 난제로 타결을 보지 못한 채 4년6개월을 끌었다. 미국은 깐깐했다. 한국에 핵연료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포기하는 골드 스탠더드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동맹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였다. 칼자루는 국내 첫 상업용 원자로인 고리원전 1호기에 원천기술을 제공한 미국이 쥐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협정은 타결됐고 한국은 재개정 요구권을 갖게 됐다. 협정 유효기간도 20년으로 반으로 줄였다.

국회에서는 26일 의미 있는 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필요한가’. 국내 원자력 연구 양대 산맥인 한국원자력학회와 한국핵정책학회가 참여했다. 의견은 둘로 갈렸다. 한 쪽은 핵연료 재처리를 하려면 2035년에 협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봤고, 다른 쪽은 그 전이라도 미국 동의가 있으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협정 전문과 협상 과정을 복기하면 후자가 맞다.

핵연료는 평화와 파괴,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원자력 발전의 필수재이면서 핵무기의 원천이다. 원전 가동 후 발생한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확보하면 핵물질이 된다. 원심분리기를 돌려 순도 95%의 고농축우라늄(HEU)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미국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핵연료 재처리와 원심분리기, 우라늄 공급을 통제하는 이유다. 하지만 세상은 변한다. 국제질서도 바뀐다. 2015년과 2024년의 세상은 다르다. 무엇보다 북한은 핵보유국이 됐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 핵개발의 족쇄를 항구적으로 채우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한국은 핵질주에 나설 경우 부닥칠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국제사회 제재로 한국 경제는 핵폭격을 맞는다.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도 탈퇴해야 한다. 미국은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NPT가 붕괴되는 상황은 절대적으로 막고 나설 것이다. 핵무장론은 지금 한국의 선택지가 아니다.

그보다 먼저 윤석열 정부는 한미 원자력협정 재개정을 미국에 요구해야 한다. 일본 수준의 권한이 필요하다. 일본은 1988년 미일 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해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권한을 확보했다. 일본은 되고 한국은 안 된다는 것은 북핵 위협 상황에서 주권의 불평등 침해다. 일본은 플루토늄 47t을 갖고 있다. 고리·한빛 원전의 경우 사용후핵연료 저장률이 각각 90.8%와 81.5%다. 2028년과 2030년이 되면 저장공간도 없다. 지속가능한 원자력 발전을 위해서도 재처리는 시급하다. 핵연대 조짐을 보이는 북한-중국-러시아에 맞서 한국은 조건만 충족되면 1∼2주일 안에 핵무기를 제조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도 있다. 공포의 잠재적 균형이다.

미국 대선의 종착역이 어디일지 몰라도 동맹에 방위비분담금 인상을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은 원자력 주권, 나아가 핵잠재력을 확보할 기회다. 서울에서는 28일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7차 회의가 열리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1조2896억 원을 부담했다. 반면, 일본은 2조2000억 원을 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장기적 안목에서 분담금을 합리적으로 더 내고 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받아내는 딜이 필요하다. 한국은 세계 11위권의 경제 대국이다. 머리 위에 핵폭탄을 이고 사는 나라가 돈을 아까워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외교와 안보는 국가의 흥망과 성쇠에 직결된다.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이 있다. 값싼 동맹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교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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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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