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여름이 조용히 지나간다. 생의 무한 나선 속으로 여름은 곧 사라지리라. 끔찍이도 더웠으나 찬란해서 아름답고, 식지 않는 밤의 열기로 괴이했던 여름이여, 잘 가라. 온 세상을 끓게 하던 여름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지상에서 사라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 아침 선선해진 바람과 쾌청한 하늘은 지금이 묵은 여름을 전별하고 새로운 계절을 맞을 때라는 신호일 테다.
산책할 때 지나는 동네 텃밭은 거두지 않은 고구마 줄기로 무성하게 뒤덮였다. 그 옆 담벼락 아래 토란들은 키가 훌쩍 자라 보기 좋았다. 토란잎은 방패 모양이고 녹색인데, 어린 시절 넓은 잎사귀를 우산처럼 받쳐 들고 놀았던 추억이 선명하다. 그 시절 마당에는 모깃불을 피우고 나는 평상에 누워 밤하늘의 영롱한 별 무리를 올려다보았다. 외할머니는 내가 잠들 때까지 모기를 쫓느라 부채질을 해주셨다.
폭염에도 세상은 움직이는 걸 멈추는 법이 없었다. 동네 황태해장국집은 새벽에 문을 열고, 집배원은 우편물을 갖고 찾아온다. 인구가 준다지만 아기들은 여전히 태어나고, 누군가는 말기암 판정을 받고 오열을 터뜨린다. 필리핀 여성들이 국내 가정집에 가사관리사로 일하러 입국했다. 그들의 표정은 밝고 발랄했다. 음주운전을 하고 거짓말을 했다가 비난받은 유명 가수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올해 첫 태풍 ‘종다리’는 북상하다가 뭍에서 위력을 잃은 채 수도권을 빠져나갔다. 국회 청문회에 나온 장관 후보자들의 표정이 뜻밖에 무덤덤하고 권태로워 보여서 조금 놀랐다. 오래 연인으로 지내던 이들이 다투고 헤어졌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온다. 손톱과 발톱은 아무리 부지런히 깎아도 날마다 조금씩 자란다. 이 모든 일이 일상 범백사(凡百事) 중 아주 작은 일부다.
공중에는 정체 모를 드론이 떠다니고, 밤에는 길고양이들이 앙칼지게 울었다. 열대야로 숙면을 못 이루고 땀에 젖어 깨어났다. 새벽은 막막한데 무기력했다. 의대생 증원 문제로 의료계와 정부는 계속 대립 중이다. 마지막까지 병원을 지키던 의사들마저 떠나자 응급실은 텅 비고 응급 환자들은 길거리를 떠도는 게 뉴노멀이 된 현실을 용납하기 힘들다. 어쩌다 이토록 꼬였을까? 환자들의 치료받을 권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팬데믹 위기가 지났는데 또다시 감염병이 유행이다. 고령 환자들은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관리받는다고 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험한 바다에서 암초들에 부딪친 채 표류 중인가?
올여름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고 여행 가는 꿈만 꾸었다. 인천국제공항은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들로 붐볐다. 여행이란 떠난 곳으로 돌아오는 궤적 안에서 이루어진다. 배낭을 메거나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귀환하는 여정을 머릿속에 그린다. 여행은 나날이 반복되는 범속함에서의 벗어남이자 속죄의 여정이고, 흐트러진 삶의 질서를 다시 가지런히 하는 일이다. 장소와 지리의 자식들로 태어난 우리는 용기와 격정을 품은 채, 가능한 한 더 많은 장소와 지리를 겪어내야 한다. 그래야 삶의 느낌이 풍부해지고 삶의 뿌리를 더 단단히 내릴 수 있다. 내년 여름엔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올여름에도 무더위를 잊으려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손에 쥐었다. 이것은 2500년 묵은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한 모험과 여행 이야기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귀환하려고 갖은 고난과 역경에 맞선다. 오디세우스는 모험가이지만, 달리 보면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트로이를 함락하고 수년을 떠돌며 무수한 도시들을 거치며 무수한 풍습들을 발견한 영웅조차도 속으로는 불안에 떨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바위와 암초로 뒤덮인 바다를 항해하며 자기 목숨을 구하고, 거느린 부하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무수한 난관을 넘어서 이타카에 도착한다. 그가 내뱉은 탄식을 들어보라!
‘아, 슬프도다! 나는 또다시 어떤 땅에 표류한 걸까?
난폭하고 야만적이고 의롭지 못한 자들을 만나게 될까?
아니면 손님을 환대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까?’
우리는 호메로스의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다. 세상의 모든 바다는 다 항해되고, 섬들과 대륙이 다 발견되자 장소에 대한 신비는 사라지고, 탐험가들은 할 일을 잃었다. 일부는 타락한 영혼이 되어 사이버 공간으로 숨어들어 암약한다. 난폭하고 야만적인 시대에 사이버 공간에서 교활한 자들이 쾌락과 탐욕만을 좇으며 활동한다. 그들은 정의로 위장한 채 약한 이를 등쳐 먹고 능욕을 일삼는다. 자신이 악인 줄도 모른다는 사실에 더 소름이 돋는다.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바람의 결이 며칠 전과 완연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묵은 여름과 새로 올 여름 사이에서 기분이 좋아졌다. 온 세상이 미쳐 날뛰더라도 우리는 꿋꿋이 살아봐야 한다. 계절이 순환하고, 별들이 우주의 제 궤도를 도는 동안 어린 것들은 자애로운 어머니들 품속에서 자장가를 들으며 잠이 든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태어남이 끔찍한 아름다움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저기 천진하고 무구하게 웃고 있는 어린 것의 얼굴을 보라! 우리는 살아서 저 어린 것을 지키고 보살필 책임을 다하며 내일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