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국가의 러시아에 대한 견제와 공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12년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대패하고 귀국한 직후부터다. 나폴레옹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철저한 변방 국가였다.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는 유럽을 향해 서진하기 시작했다. 크름반도와 중앙아시아로 남진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억 명이 넘는 인구와 세계 최대의 국토를 보유하고, 서방과는 다른 인종(슬라브인)과 종교(정교회)로 무장한 러시아의 세력 확대에 서방 국가는 두려움을 느꼈다. 1853년 크름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맞서 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러시아(구소련)를 전면 침공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보고 후퇴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2년 넘게 이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서방이 러시아 본토를 침범한 사례가 없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지난 6일 전격적으로 국경을 넘어 러시아 서남부 도시 쿠르스크주로 진격했다. 오랫동안 서방이 가지고 있던 러시아에 대한 포비아를 깨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리한 국면을 차지했다는 분석부터 우크라이나 정부가 쿠르스크주 등 러시아 본토의 일부를 점령한 후 휴전협상에서 이를 크름반도 또는 돈바스 지역과 맞교환하려는 계획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서방 국가들 사이에선 우크라이나가 위험한 승부수를 던졌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미 정부 당국자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서 지금의 위치를 유지할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제정치학계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도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침공은 중대한 전략적 실수로, 패배를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째 이어지면서 전쟁 피로감이 높아지자 우크라이나 반격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나선 것이다. 이들 국가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에 대한 서방 무기 사용제한을 완전히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전쟁이 소모전 양상으로 흐르고 있는 가운데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조기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영토 상실을 전제로 한 협상에 나설 것을 고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될 후보 중 한 명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영토 일부를 내주는 전쟁 종식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와 서방 세력이 충돌하는 불리한 지리적 입지에 자리 잡고 있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통탄할 만한 노릇이다. 우리에겐 강대국 간 지리적 완충지대가 강대국 간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 명백히 볼 수 있는 사례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 완충지대라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한국 정치인들이 과연 우크라이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