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9단이 1989년 9월 5일 제1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우승 후 다음날 귀국해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조훈현 9단이 1989년 9월 5일 제1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우승 후 다음날 귀국해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 역사 속의 This week

지난해 신진서 9단이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는 응씨배 챔피언에 등극했다. 지난 2009년 최철한 9단의 우승 이후 14년 만에 패권을 탈환한 쾌거였다. 응씨배는 대만 재벌 응창기(應昌期·잉창치)가 1988년 창설한 최고 권위의 세계 기전으로 4년마다 열리며 우승 상금이 40만 달러(약 5억3000만 원)에 달한다. 한국은 6차례 정상에 오른 최다 우승국이다. 조훈현 9단을 시작으로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가 4연패의 위업도 이룩했다. 응씨배 초대 우승자인 조 9단은 1989년 9월 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결승 5국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세계 바둑은 중국이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가운데 일본이 주도하고 있었고, 한국은 변방에 불과했다. 주최 측이 초청한 16명 중 한국 기사는 조 9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수들을 연파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1980년대 후반 중일슈퍼대항전에서 11연승을 달리며 ‘철의 수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중국의 녜웨이핑(섭衛平)이었다.

5판 3선승제였는데, 조 9단은 1국 승리 후 두 판을 내리 내주었다. 벼랑 끝 4국에서 이기면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고, 마지막 5국에서 사투 끝에 145수 만에 불계승하며 3대 2 역전승을 거두었다. 한국 바둑 최초로 세계를 제패하고 금의환향한 그는 김포공항에서 종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의 우승으로 한국 바둑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고, 국내엔 바둑 붐이 일었다.

1953년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1962년 세계 최연소인 9세에 프로기사로 입단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스승 집에서 살며 9년 동안 바둑을 배웠다. 병역 이행을 위해 1972년 귀국한 후 국내 기전을 전부 석권하는 전관왕 3회와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응씨배, 후지쓰배, 동양증권배)을 달성했다. 1982년 29세에 한국인 최초로 9단에 올랐으며, 국내 통산 최다 타이틀(160회)과 세계 통산 최다승(1963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화려한 반상 기록을 써내려간 ‘바둑황제’는 자신의 제자 이창호에게 모든 타이틀을 넘겨주며 1995년 무관으로 전락하는 쓴맛을 보기도 했으나 이후 재기에 성공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바둑 외길을 걷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금배지를 달았다. 프로바둑 기사 휴직 중이던 2019년에는 녜웨이핑과 응씨배 제패 30주년 특별대국을 벌이기도 했다. 이듬해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반상에 복귀한 그는 “역시 평생을 걸어온 길이니, 동네(바둑계)에서 노는 게 나은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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