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훈 논설위원

중도층 본격 공략 표방하고도
상속세 완화 부자감세론 여전
성장론도 기업 규제틀 못 벗어

팬덤 의존 권력은 실질 힘 아냐
노선 변화는 지지층이 등 돌릴
리스크 감당해야 진정성 얻어


“내 지지층이 등을 돌리게 한 네 번째 선택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초 협상 개시를 선언했던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 한 말이다. 대북송금특검법 수용, 이라크 파병, 대연정 제안에 이어 “노무현은 매국노”(양문석)란 비난까지 받았던 일이다. 보수의 어젠다를 쥐는 바람에 지금도 진보 진영에서 비판을 받는 결행이었다. 여론도 최악이었다. 쌀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대회에서 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농민 두 명이 사망했다. 그래도 “FTA를 회피하기는 어렵다. 낙오를 면하려면 뛰어들어야 한다. 우리 국민의 역량을 믿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다 이루어 낸 우리의 현대사를 볼 때 국민이 FTA에 내포된 위험과 불확실성을 감당해 갈 수 있다고 믿었다”(사후 자서전 ‘운명이다’)고 했다.

그에겐 의지만이 아니라 사실 판단의 문제였다. “개방과 관련된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예컨대 1980년대 초반 ‘외채망국론’이 있었다…사실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주장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은 물론 정치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미FTA가 발효된 2012년 이후 양국 간 경제 관계만 아니라 외교안보까지 동맹 확장의 성과를 놓고 보면, 정치적 리스크를 감당하는 리더의 용기와 결단이 국가 역량에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좌건 우건, 정치 노선 전환은 지지층에 의존한 정치공학을 과감히 버릴 때 가능한 일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기 체제에 들어서자 ‘중도확장론’을 펴고 있다. 일극체제를 완성했으니 이제 수권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중도층 유권자를 겨냥한 중원 전쟁에 달려들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주력하는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층)’ 외연 확장과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보수의 대표 브랜드인 ‘성장’도 마다 않을 태세다. ‘먹사니즘’에 상속세·종부세 완화 등 세제개편 카드도 꺼내 들었다. 소속 의원들은 민생·경제 관련 연구 모임을 만들어 입법활동으로 연결하고 있다. 겉으로만 보면, 재판 리스크만 빼놓고는 집권 플랜이라도 가동되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1일 한 대표와 양자 회담에서 민생 공통 공약 추진을 위한 협의 기구 구성을 합의한 것도 그런 차원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순과 충돌의 잉태가 보인다. 상속세 완화의 경우 일괄공제·배우자 공제액을 상향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최고세율은 고액 자산가들에게 혜택이 집중돼 부자 감세란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냥 뒀다. 종부세도 손을 보긴 하겠다는데, 정부·여당의 폐지론과 달리 1주택 소유자에 한하고 있다. 이 역시 같은 이유다. 자산 규모 증가에 따라 중산층까지 세 부담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는 판단이라면, 부자 감세 프레임을 버려야 하는데도 여전히 지지층 눈치가 먼저다.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나오자, 기획재정위 소속 의원들이 “부자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정부의 목표”라며 거부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성장정책이라고 해서 입 밖으로 나온 건 신재생에너지 생산·유통 인프라 확대뿐이다. 기업 정책이라곤, 울며 겨자 먹기 같은 RE100(2050년 재생전력 사용 100%)에 사활이 걸린 것처럼 압박하는 게 전부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에 목매달았던 것과 너무 닮았다. 성장의 동력보다 규제의 구실만 찾는다고 해도 과하지 않아 보인다. 이 대표가 곧 경제단체 수장들과 회동한다고 하는데, ‘노란봉투법’ 등에 전향적이지 않으면 요식행위에 그칠 게 뻔하다.

지지층 확장은 강성 팬덤에 의존적인 정치 행태와 결별하는 과정, 치열한 자기 부정을 통해 가능하다. 윤석열 정부의 끝장을 보겠다는 개딸에 의지해 영향력을 유지하고 그 권력에 취해 있는 한, 중도확장이란 기치는 유권자 기만이 될 공산이 크다. 구호만이 아닌 성과를 내야 거대 야당 수장의 실질적인 정치 위상과 힘을 갖는다. 이번 정기국회가 최대 시험대다. ‘노무현의 결단’ 수준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거부권 유발당’ ‘탄핵 남발당’으로 고착되지 않을, 누구나 수긍할 입법 실적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게 제 살기에 급급해 정치공학의 주판알만 튕긴 리더로 판명 나지 않는 길일 것이다.

오승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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