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질서가 격동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과 공급망 재편, 새로운 강대국의 지위를 선점하기 위한 인공지능(AI)과 데이터 중심의 기술 전쟁, 그 기반으로서 반도체와 에너지 안보 위기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불확실하고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마주하면서 사회 전반에는 막연한 불안감이 만연하다. 이해관계가 더욱 파편화하면서 사회의 구심점을 찾는 일도 어려워지고 있다. 온 나라가 의기투합해 달려들어도 모자란 판에 거대 양당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조선왕조는 변화하는 세계 질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당파 간 대립과 갈등, 국론의 분열과 국정 농락, 지배층의 외세 편입 등을 겪으며 망국의 길을 걸었다. 불행과 자멸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건 아닐까.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난 2일 제22대 국회 개원식이 열렸다. 임기가 시작된 지 근 100일 만이다. 역대 최장 지각 국회라는 타이틀로 시작했지만, 민생과 국익을 중심으로 일하면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특히, 지난 제21대 국회 때 상정됐던 국가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과 AI 기본법,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이나 사이버 안보법 등은 입법이 시급하다. 모두 다가오는 디지털 미래를 위해 정부가 마땅히 준비해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다.
앞으로의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국가 차원의 AI 거버넌스를 갖추고 기술과 산업 역량을 극대화하면서도 안전 문제에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간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대한민국이 디지털 경쟁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 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AI 산업과 그 기반이 되는 데이터센터 운영, 반도체 산업 등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전력망 확충,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원전 운용과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 해소 등이 필수다.
이 과제들은 모두 지역 주민의 동의, 지자체 간 이해관계 조정, 보상과 지원, 인허가 절차 개선 등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한다. 한편, 국가와 사회 전반의 디지털 전환이 급격히 이뤄지는 상황에서 사이버안보 문제는 더는 특수 영역이 아니다. 사이버안보 위협에 적극적·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국가와 사회의 핵심 기반은 물론 국민의 생명과 재산도 보호하기 어렵다.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고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에 정치적 입장이 우선돼선 안 된다. 현장의 문제를 중심으로 역량을 가진 주체에게 확실한 권한과 필요한 자원을 부여해야 한다. 국회가 정파적 갈등으로 정말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면 헌법 정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적 집단과 다를 바 없다. 정쟁 사안이 아닌 법안들은 오직 객관적인 사실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쟁점을 심의하고 신속히 의결해야 한다.
다행히 지난 1일 열린 여야 대표 회담에서 민생 공통 공약 추진 협의기구를 통해 전력망특별법을 우선 과제로 처리하기로 했다지만, 괴담에 편승한 지방자치단체들의 님비(NIMBY)를 설득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민생과 국익을 우선 가치로 두고, 무엇보다 진실한 소통이 중요하다. 국민에게 본격적인 출발을 신고한 제22대 국회가 미래를 준비하는 생산적인 국회로 거듭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