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김태성 옮김│민음사
‘침대 위의 남자아이를 본 아이는 전혀 낯선 느낌 없이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본 듯이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 베개를 끌어당기고 눈을 비비더니 허리를 쭉 폈다.…아이는 이 남자아이의 냄새가 무척이나 좋았다. 새하얀 와이셔츠 밑에서 옅은 흙과 풀밭의 향기가 났다.’(본문 중에서)
정말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인연이 있을까? 소설 속 ‘그’와 ‘그녀’는 6세 때 매트리스 TV 광고 현장에서 처음 만난다. ‘그녀’는 첫눈에 알아본다. 저 아이 옆에 있으면 언제든 솔솔 잠이 올 거라고. 공전의 대박을 친 TV 광고로 인해 ‘꿀잠 듀오’는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때로 세상의 관심은 돈과 권력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유명세는 ‘그녀’를 ‘어릴 때부터 남자와 몸을 섞은 여자’라며 가십의 대상에 빈번히 올려놓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쉽게 잊는 사실이 있다. 여성과 남성의 모든 관계가 반드시 사랑과 섹스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동성애자다.
‘67번째 천산갑’은 ‘귀신들의 땅’(민음사)으로 올 초 대만 문학을 다시 보게 만들었던 소설가 천쓰홍의 최근작이자 그가 한국 독자들에게 안기는 두 번째 작품이다. 소설가이자 배우로 활동하며 이미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밝힌 그는 대만이라는 나라가 가진 역사와 가족주의를 녹여낸 전작에서도 ‘동지(同志)작가’(퀴어를 긍정하는 작가)로서의 면모를 면면히 드러냈다.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게이미(gay蜜)’(게이 남성과 친밀한 이성애자 여성) 소재를 통해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라서 이름이 공개되기 전까지 소설 속 두 주인공은 ‘그’와 ‘그녀’로 표현된다. 작가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익명에 부침으로써 각각의 인물보다 관계를 우위에 둔다. 또한 그들의 관계가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특이한 관계가 아니라 사회 어디에나 있는 관계라는 점을 드러낸다.
게이 남성과 헤테로 여성은 서로 탐닉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둘 다 남성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렇기에 두 주인공은 서로에게 말 못할 비밀은 없다는 듯 모든 고민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들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다르다. 그렇기에 살며 마주하는 어려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책은 한 개의 장에서도 수차례 시간과 공간을 바꿔가며 각자의 결핍을 그린다. 여성이자 배우로 사는 ‘그녀’가 마주하는 사회적 시선과 부담감, 만연한 성적 폭력, 가부장제를 아프게 드러낸다. 또한 게이 남성이 겪는 부모로 인한 트라우마, 가벼운 만남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들도 빼놓지 않는다.
각자의 삶이 고단한 만큼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해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결코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인연이 시작되던 촬영 현장에 함께 있던 동물 ‘천산갑’을 떠올리며 언제나 대체할 수 없는 포근함을 느끼고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양 대신 천산갑을 헤아린다.
소설의 다양한 시간 축 중에서 주된 시간 축은 영화 촬영 당시와 현재다. 두 시점 모두 그들은 각각의 이유로 ‘낭트’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하지 못한 채 서로에 관한 이야기만 나눌 뿐이다. 마치 결말에 닿는 것보다 결말에 닿기까지 서로를 보듬는 따스한 시간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듯이. 492쪽, 1만8000원.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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