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38) 인도 콜카타
1690년 英 동인도 회사 설립
인도양 식민지 착취물건 집결
벵골만 천혜 항구… 허브 번영
페르시아·중국인 부 좇아 몰려
19세기 인구 50만 국제도시로
동벵골 분리 방글라데시 독립
힌두난민 몰려 환경 최악으로
키플링 “끔찍한 밤의 도시”
“뭄바이 사람이 몰두하는 건 돈이고, 델리 사람이 몰두하는 건 권력이다. 그러나 캘커타 사람이 몰두하는 건 ‘오늘 집에서 밥을 먹을 것인가’이다.” ‘콜카타’에서 작가 아밋 초드리는 말한다. 2001년 벵골 정부는 인구 1400만 명에 이르는 이 도시의 이름을 캘커타에서 콜카타로 바꿨다. 영국 식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캘커타란 이름이었을 때, 영 제국의 인도 총독부가 있던 이 도시는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현재 도시는 콜카타란 명칭을 돌려받은 것만으로 자부하기 힘들 정도로 몰락했다. 권력은 중부 델리가 독점하고, 돈은 서부 뭄바이로 몰린다. 인도 동부 벵골의 중심지 콜카타엔 돈도, 힘도 없다. ‘칼리의 노래’에서 댄 시먼스는 콜카타를 ‘사악한 도시’라고 묘사했다.
“공장은 바스러진 벽돌과 녹슨 철근, 삐죽삐죽 무성히 자란 잡초, 깨진 유리창으로 만들어진 초대형 공예품처럼 보였다. 산업화 시대가 이 땅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썩어 가는 사체를 남긴 것이다. 무너져 내린 폐허 더미에서 누추한 인간의 형상들이 시커먼 건물 출입구를 드나들었다.”
물론, 여기엔 서양 작가 특유의 인도 빈민가 관음증이 느껴진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자기의 누추한 행복을 자위하는 저열함이 드러난다. 조지 오웰은 이런 제국주의적 시선을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고 미학적으로 역겹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 황폐는 한 세기 만에 처참히 몰락한 콜카타의 증언이기도 하다. 영화 ‘시티 오브 조이’가 보여주듯, 사람들은 피를 팔아 밥을 사고, 인력거를 끌어 하루를 버티다, 끝내 딸을 위해 뼈까지 팔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콜카타의 찬란한 과거와 비참한 현재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의 표피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이 도시는 영국 식민 통치의 창조물로, 제국주의 근대화의 전형 그 자체인 까닭이다. 영국 식민주의자 커즌은 우쭐댔다. “캘커타는 아시아 땅에 세워진 유럽 도시로, 영국 민족의 성취를 기념하는 가장 인상적 기념비다.”
169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오기 전에 콜카타는 갠지스강 지류 후글리강 기슭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마을 이름은 칼리카타, 죽음의 여신 칼리를 모신 오래된 사원 칼리가트에서 유래했다. 1690년 동인도회사는 무굴제국의 벵골 통치자(나왑)에게 매년 돈을 바치기로 하고, 이곳에 상관을 설치했다. 캘커타의 시작이었다. 위로 갠지스강을 타고 인도 내륙으로, 아래로 벵골만으로 이어지는 천혜의 항구였다.
영국은 군사 요새를 짓고, 창고와 시장을 설치하면서 이곳을 식민 도시로 바꿔갔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이겨서 이 지역 나왑을 제거하고 벵골 땅 통치권을 얻은 게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영국 식민 통치가 실질적으로 시작되면서, 1774년 마침내 콜카타에 총독부가 들어선 것이다.
영국은 벵골에서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페낭으로 이어지는 인도양 식민 제국을 건설했다. 콜카타는 그 허브였다. 인도양 식민지에서 착취한 물산이 이곳에 모여서, 인도의 홍차, 담배, 아편, 면화, 인디고 등과 함께 배에 실려 영국으로 향했다. 아르메니아인, 페르시아인, 중국인, 유대인, 파르시 등이 부를 좇아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19세기 말 콜카타는 다인종, 다민족, 다종교가 함께 어울리는 인구 약 50만 명의 국제 상업 도시가 되었다.

콜카타엔 벵골 르네상스라 부르는 문화적 변혁이 일어났다. 주축은 중간계급 바드라록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관료, 교사, 의사, 변호사, 사무원을 양성하려고 영국이 세운 대학에서 교육받은 계층이었다. 정치의 람 모한 로이, 문학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물크 라즈 아난드, 사상의 라마크리슈나와 비베카난다 등은 서구 사유와 인도 영성을 결합해 근대인도의 정체성을 개척했다.
‘만질 수 없는 사람들’에서 아난드는 불가촉천민(달리트)의 고통을 다뤘다. 달리트 청소부인 바카는 욕먹는 게 삶이다. 위쪽 계급 사람과 부딪혔다는 이유로 뺨을 맞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 그 몸을 건드렸단 이유로 얻어맞는다. 바카는 한탄한다. “만질 수 없는 것, 만질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세상이야!” 아난드는 똥오줌 없는 서양 화장실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오물 옆에서 끝나지 않는 삶”을 상상케 한다. 억압적 봉건 체제의 대안으로 근대화를 제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 근대는 자칫 가혹한 식민 착취의 부스러기일 수 있었다. 콜카타가 빛날수록 인도 전체는 어두워졌다. 식민 지배 이전 인도는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는 부유한 나라였다. 그러나 1947년 독립할 때 GDP는 고작 4%였다. ‘암흑의 시대’에서 샤시 타루르는 주장했다. “산업화 버스를 놓쳐 인도 GDP가 떨어졌다면, 그건 영국이 인도인을 바퀴 밑으로 던져 넣었기 때문이다.”
그 차별과 착취는 거주지 분리에서 선연히 드러난다. 콜카타의 인프라 투자가 백인이 거주하는 화이트타운에 집중되자, 블랙타운은 점차 오물과 질병의 온상으로 변했다. 키플링은 더럽혀진 콜카타를 ‘끔찍한 밤의 도시’라고 말했다. 위생 장벽을 세워 생지옥을 만든 자들이 그곳을 엿보면서 조롱하는 역사 왜곡이자 뒤틀린 우월감이었다.
차별과 불공정은 항의와 반발을 불렀다.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콜카타는 외국 상품 보이콧, 식민 관료 암살 등 투쟁의 거점이 됐다. 개화한 중간계급이 인도국민회의(1885)를 결성해 그 중심에 섰다. 타고르는 노래했다. “마음엔 두려움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은 담으로 세계가 조각나지 않은 곳,/ (중략) /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신이여, 이 땅이 깨어나게 하소서.”(‘기탄잘리 35’ 중에서)
그러나 “인도인에게 자유를 주는 건 이들을 더 비참하게 만들 것”(윌리엄 존스)이라고 믿는 자들이 기도를 들어줄 리 없었다. 1905년 영국은 벵골 분할을 책동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분열시켜 독립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였다. 폭동을 이어가는 등 인도인이 거세게 반발하자, 영국은 벵골 분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11년 총독부를 델리로 옮기면서 보복했다. 끝내 콜카타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린 것이다.
인도가 수탈의 도구였을 때, 콜카타는 영국의 자부였다. 그러나 영국의 악몽이 되자, 콜카타는 무참히 버려졌다. 제국주의자는 식민 도시를 약탈의 발판으로 삼았을 뿐 근대 자체로 변하길 원하지 않았다. 콜카타는 식민지 근대화라는 작은 부스러기에 집착해 큰 진실을 망각한 노예의 논리에 불과함을 생생히 드러낸다.
권력을 잃은 콜카타는 20세기 내내 약해졌다. 1971년 영국의 식민 통치가 남긴 재앙이 몰락한 콜카타를 덮쳤다. 동벵골이 분리돼 방글라데시가 되자, 힌두 난민이 일시에 몰려들어 도시 환경이 최악으로 떨어졌다. ‘그림자 선’에서 아미타드 고시는 그 비극의 원인을 벵골에 영국이 그은 가짜 국경선, “자의적 망상으로 얼룩진 그림자 선”에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벵골 르네상스
벵골 르네상스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벵골 지역에서 일어난 근대화 운동을 말한다. 카스트 차별 중지, 여성 인권 향상, 교육 장려 등 사회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인도적 영성과 서구적 합리주의를 조화한 독특한 사상, 인도적 전통과 서구적 형식을 결합한 문화 양식 등이 나타났다. 르네상스는 인도인의 민족적 자부심에 영향을 끼치면서 인도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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