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극단 모두 소수가 다수 지배 2000명 흔들리면 끝이란 공포 질 줄 모르면 민주주의 무너져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앞다투어 병원 응급실을 찾고 있다. 추석 연휴의 응급실 상황이 정국 분수령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까지 의료개혁을 떠받쳐 온 기본 동력은 두 개였다. 하나는 의대 증원에 78%가 찬성했던 압도적 여론이고, 또 하나는 초당적 응원이었다. 이 대표는 지난 4월 윤 대통령과 회담에서 “의대 정원 확대 같은 주요 과제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했다. 지금 그 두 기둥이 무너지고 있다.
이 대표는 4일 “의대 증원의 규모와 시기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며 등을 돌렸다. 한 대표는 한발 앞서 ‘2026년 의대 증원 유예’ 카드를 던졌다. 국민의힘 안에도 안철수·인요한·한지아 등 의사 출신 의원들은 ‘2000명 증원’과 결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민심에도 균열이 나타나는 조짐이다. “응급실 뺑뺑이를 없애겠다더니 아예 응급실을 없애 버리느냐”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의료 공백에 따른 응급실 축소로 환자와 가족들이 불안하고 불편해진 것이다.
“응급실은 문제없다”고 장담하던 정부도 태세를 전환했다. 진료지원(PA) 간호사를 확충하고 군의관과 공중보건의도 250여 명 투입한다. 응급실 자기부담금을 확 올리고 진료비용도 2배 올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의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술 위축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서울아산병원의 암 수술은 지난해보다 40% 줄고, 수술 대기는 3개월로 늘어났다. 병원마다 마취과 전공의 이탈로 수술 자체가 위태롭다. 제때 수술을 못 받아 죽지 않을 환자까지 숨지면, 회피 가능 사망률이 치솟을 수밖에 없다. 2018년 기준 한국은 10만 명당 회피 가능 사망률이 144명으로 미국(336명)·영국(222명)·독일(195명)보다 낮다.
의대 증원 힘겨루기는 6개월 넘게 평행선을 달린다. 시나브로 대통령실 주변에서 ‘2000명’은 성역으로 굳어졌다. 윤 대통령에게 “2000명 숫자에 협의 여지를 열어 두자”고 건의했던 이관섭 전 비서실장과 한오섭 전 정무수석은 물러났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도 김건희 여사와 통화를 공개하며 “왜 2000명에 집착하느냐고 물었는데 그 부분은 완강하더라”고 전했다. 상대편인 전공의와 의대생들도 강퍅하기는 마찬가지다. 의대 증원 백지화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다. 정부가 자신들을 ‘의새’로 멸칭했다며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길 거부하고 있다.
이들이 그나마 속마음을 열어놓은 곳이 소아 응급 의사 출신의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이 만든 ‘소곤소곤 간담회’다. 전국에서 450여 명의 전공의·의대생이 자발적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공부는 계속하고 싶지만, 돌아가기엔 두려운 게 너무 많다”며 혼란스러워했다. 정부가 자신들을 악마화했다는 집단 분노에 싸여 있고, “우리 없이 잘해 보세요”라는 싸늘한 분위기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6개월만 버티면 된다”고 했다지만, 이 의원은 한 달 전부터 “이들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상 유급이 확정적”이라 경고했다. 그의 예언대로 2학기 의대생 복귀율은 4%에 불과하다.
윤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조짐이다. 5일 엠브레인퍼블릭 등의 여론조사에서 ‘의대 증원을 다시 정하자’는 응답(52%)이 ‘계획대로 정원을 확대하자’는 응답(41%)을 처음으로 역전했다. 보건복지부와 교육부는 “최대한 전공의와 의대생을 설득하겠다”고 할 뿐 변변한 수습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공의들 역시 비현실적인 “2025년 의대 증원 백지화”를 고집하면서 출구전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의 “지는 법을 모를 때 민주주의는 파괴된다”는 경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패배에 대한 지나친 공포 때문에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 ‘2000명’ 숫자 싸움에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극단적 소수에 의해 지배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레비츠키는 “대화와 타협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고 했다. 항상 해법은 양 극단이 아니라 중간 어디쯤 있다. 그나마 국민의힘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민주당이 “여·야·의·정 협의체를 만들자”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정치권이 해법을 찾으려면 전공의들을 조금이라도 설득할 수 있는 이주영 의원은 빼놓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