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가운데)가 1956년 9월 9일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모습. 에드 설리번 쇼 홈페이지
엘비스 프레슬리(가운데)가 1956년 9월 9일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모습. 에드 설리번 쇼 홈페이지


■ 역사 속의 This week

한 세기를 마무리하는 1999년 12월, 미국 타임지 독자들은 ‘20세기 최고 인물’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뽑았다. ‘로큰롤의 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레슬리는 1956년 9월 9일 당대 미국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 쇼에 출연하기 전부터 그는 이미 인기를 얻고 있었다. 18세의 잘생긴 트럭운전사 프레슬리는 엄마 생일 선물을 위해 노래를 녹음하러 선 레코드 스튜디오에 갔다가 사장 샘 필립스의 눈에 띄었다. 흑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자란 그는 백인이지만 흑인의 창법을 구사했다. 이듬해 ‘댓츠 올 라이트(That’s All Right)’로 데뷔해 지역 라디오 방송의 큰 관심을 끌었다. 1956년 RCA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하트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을 발표해 단숨에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어 ‘하운드 도그(Hound Dog)’ ‘돈 비 크루(Don’t Be Cruel)’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등을 줄줄이 히트시키며 프레슬리의 시대를 열었다.

그해 9월 에드 설리번 쇼에 첫 출연 했을 때 미 전역에서 6000만 명이 그의 무대를 지켜봤다. 시청률이 무려 82.6%로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진행자인 에드 설리번은 처음엔 그가 나오는 것을 꺼렸다. 앞서 다른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큰 반향과 함께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의 골반을 흔드는 춤동작은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젊은층에서는 열광했지만, 보수적인 기성세대에게는 도발적이고 선정적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이날 TV 화면에서 프레슬리의 모습은 주로 상반신만 보였다. 21세 청년 프레슬리는 당시 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으며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영화배우로도 성공해 총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제대 후 1960년대에는 영화에 더 집중하며 음악적 침체기를 겪다가 1968년 컴백 공연으로 재도약 발판을 마련했고,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73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통해 생중계된 하와이 콘서트에서는 40여 개국 15억 명이 시청한 가운데 다시 한 번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그는 아내 프리실라와 이혼한 후 상실감에 폭식하며 체중이 증가했고, 수면제와 각성제 등 약물남용으로 건강이 점차 악화했다. 1977년 8월 심장마비로 4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을 때 미국 언론들은 “왕이 죽었다(The King Is Dead)”고 했다. 그는 빌보드 차트 1위에 18곡을 올려놓았고, 전 세계적으로 수억 장의 음반 판매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비틀스의 존 레넌이 “엘비스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을 만큼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다 돼 가지만 프레슬리가 살았던 그레이스랜드에 여전히 한해 60만 명이 찾고 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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