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속도 못 따라가는 제도·법 N번방 사건 후 여전히 제자리 일상 붕괴에 전방위 대책 절실
1999년말 빌보드 한국 특파원이 ‘K-팝’이라는 단어를 쓴이후 ‘대문자 K’는 한국의 상징적 접두사가 됐다. K-팝, K-드라마, K-푸드는 물론 K-배터리, K-원전, K-방산처럼 전방위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K를 호명할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자격이 필요하다. 첫째 지극히 한국적인 특징이 있어야 하고, 둘째 전 세계 1, 2위를 다투는 ‘수위권’에 들어야 한다. 그런데 참담하고 부끄럽게도 이번에 ‘빌런 K’의 등장이다. K-디지털 성범죄 말이다.
한국의 딥페이크(허위 영상물) 성범죄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썼고, 영국 BBC와 가디언은 특집을 마련했으며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여성들의 온·오프 연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이 ‘가짜 성착취물을 생성·유포하는’ 세계적 문제의 ‘진앙(epicenter)’이라고 했다.
미국 사이버보안 업체 시큐리티 히어로의 최근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딥페이크 음란물에 가장 취약한 국가다. 지난해 7∼8월 딥페이크 음란물 사이트 10곳과 동영상 플랫폼 딥페이크 채널 85개에 올라온 영상물 9만5820건을 분석한 결과, 등장하는 개인 중 한국인이 53%로 가장 많았다. 딥페이크 음란물의 표적이 된 개인 10명 중 8명은 K-팝 가수였다. 한국이 디지털 성범죄 1위국인 셈이다. 최대 피해자인 한 한국 가수는 1595건에 등장해 조회 수는 561만 회에 이르렀다. K-팝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며 한국이 문화 강국으로 등극했다는 자부심이 차오르고 있을 때 음지 디지털에선 여자 아이돌 가수들이 성범죄 최대 피해자가 되고 있었다.
이번에 피해자가 초중고교생까지 확대되면서 사회적 관심이 폭발했지만, 이는 한국의 오랜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뿌리 깊은 성차별과 성폭력, 빠른 기술을 못 따라가는 법과 제도 그리고 정쟁에 매몰된 정치의 결합이다. 한국에서 2022년 성폭력 발생률은 10만 명당 80.5건. 성범죄는 시간당 3.4건으로 증가 추세다. 2023년 교제 폭력으로 입건된 피의자는 1만3000여 명. 역시 매년 늘고 있다. BBC는 “한국은 세계 부국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심한 곳으로 급성장한 기술 산업에 만연한 성희롱 문화가 더해져 디지털 성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초고속 인터넷’이 상징하듯 늘 기술은 빠르게 도입하지만, 법과 제도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미국, 유럽에선 SNS와 거대 플랫폼에 대한 규제 법안이 잇따라 제정·시행되는 것과 달리 아직 빈손이다. 성범죄물과 가짜뉴스가 끊임없이 제기돼도 당국은 늘 해외 플랫폼에 요청했지만 답이 없다는 무책임한 말만 되풀이해왔다.
결국, 2019년 이른바 ‘N번방’ 사건을 겪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국회는 지난해 디지털 성범죄의 징역형 상한을 올리는 법안, 디지털 성착취물을 수사기관이 압수·보전하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무관심 속에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번에 사건이 터지자 의원들은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22건을 포함해 무려 33건을 발의했는데 급조하다 보니 내용이 비슷하고 제21대 국회 때 폐기된 법안과 다르지 않다.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엔 유명인뿐 아니라 가족, 친구, 동료는 물론 교사, 여군에 여기자까지 포함됐다. AI봇으로 2000원에 음란 사진, 1만 원에 음란 영상을 만들 수 있다. 피해자 개인정보 노출도 심각하다. 거리도, 가정도, 학교도, 직장도, 모든 곳이 위험해졌고 일상과 신뢰는 무너졌다. 세상이 위험하니 문 닫고 집에 있는다고 안전하지 않다. 모두가 피해자의 모집단에 들어왔다. ‘성범죄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라’는 주장은 젠더 문제도 정치의 문제도 아니다. 법·제도부터 미디어 리터러시·성 예방 교육까지 할 일이 산더미다.
한국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나일 수 있다’ 즉, 한국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디지털 성범죄 1위의 오명을 벗고 전 세계적 위험에 모델 규범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최초의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말했다. “시작은 항상 오늘이다(The beginning is always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