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정책에 반발한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비롯된 의료대란이 시작된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그동안 전공의들의 대거 이탈 등으로 의료 환경은 더욱 나빠졌고, 병원에서 의사 부족을 이유로 제때 치료받지 못해 골든타임을 놓치는 사례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의료대란의 가장 기본적인 쟁점은 필수의료를 감당하기에도 현재의 의사 수가 매우 부족하므로 의대 정원의 대폭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정부 주장과 의대 정원의 대폭 확대로 인해 의사 인력의 과잉 공급 및 그로 인한 각종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의사들 주장이 서로 엇갈리면서 어느 쪽이 옳으냐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사 인력의 수급뿐만 아니라 의료 서비스의 질, 전공의의 열악한 근무 환경, 의사의 보수 등이 복합적으로 논의되면서 더욱 혼란스럽다.
이러한 혼란은 몇 가지 기본적인 쟁점부터 정리하는 것이 순서에 맞는다.
가장 먼저 정리돼야 할 것은, 의대 증원의 필요성 및 규모에 대한 접점 확인이다. 정부는 2000명 증원을, 의사협회는 증원 백지화를 고수하는 한 접점을 찾기 어렵다. 양쪽 모두 입장이 탄력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 때 대화와 타협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선결 과제는 환자 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다. 환자를 볼모로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정당하지 않다. 집단행동 초기에는 환자를 버리고 떠나는 의사들이 비난받았지만, 최근에는 정부도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탁상행정으로 인해 환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개선책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선결 과제는 단순한 의사 수의 증원 문제에 한정하지 않는 의료개혁 전반을 위한 마스터플랜의 마련이다. 의료 서비스의 지역 간 불균형 해소, 의료 인력의 특정 분야 쏠림 해소 등이 함께 해결되지 않는다면, 의사 수 증원만으로는 의료 서비스 개선에 한계가 뚜렷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의료개혁 논란과 관련해 원칙론과 현실론이 대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원칙과 현실의 문제는 아니다. 원칙은 현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현실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개선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2000명 증원, 또는 증원 백지화를 각기 원칙이라면서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올바른 원칙이 아닐뿐더러,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리적 접점 찾기를 방해할 뿐이다.
정부나 의사협회에서 각기 자신에 유리한 자료를 근거로 의대생 증원 규모의 타당성 또는 증원의 불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국민을 위한 의료개혁이라면 의료 소비자인 환자들이, 나아가 잠재적 환자인 국민이 의료 서비스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런데 정작 환자(국민)들은 뒷전으로 돌리고 정부와 의사들이 싸우는 것도 역설적이다.
정부는 인구 1000명당 의사의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 적다는 등의 추상적 통계보다는 현실에서 환자들이 어떤 불편을 겪고 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대책이 필요한지를 근거로 국민에게 의사 증원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한다. 의사들은 외국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에서 지역별 의사 밀도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의료 서비스의 지역 간 격차 등의 해소를 위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동안 의대 정원의 확대에 관한 갈등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면 각종 통계에 의존해 해결 방향을 모색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통계를 잘못 활용하게 되면 전혀 엉뚱한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이런 통계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의료개혁의 마스터플랜이 전제된 이후, 이에 맞춰 통계가 적재적소에 활용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통계 수치는 개선됐지만 국민의 불편은 해소되지 않는, 심지어 더 심해지는 기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제라도 정부와 의사, 그리고 환자들이 (의대 증원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의료 서비스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대한 다양한 문제를 수렴하면서 의료개혁의 마스터플랜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부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고민이 의료대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진정한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