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미지의 땅)’. 고대 그리스 천문·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서’에서 처음 나온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학은 이 영역을 개척하고 그 경험을 기록하는 학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미지의 땅)’. 고대 그리스 천문·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서’에서 처음 나온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학은 이 영역을 개척하고 그 경험을 기록하는 학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50)지리학으로 철학하기

칸트, 대학서 지리학 강의개설
자연환경·지정학적 위치 주목

고대 그리스서 철학 시작된 건
바다 인접한 반도의 특성 때문

지리와 같은 경험적 조건 개입
추상적 관념화의 오류 벗게 해


하나의 학문은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지며, 이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상을 준다. 그래서 철학은 대체로 책상 앞에 앉은 사색가의 이미지를 가진다. 그리고 이 책상 앞 서생의 이미지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곳에 지리학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아직 항로가 없는 바다와 미지의 폭포와 산을 숨기고 있는 땅을 탐색하는 탐험가의 이미지이다. 우리는 이런 지리학의 이미지가 보다 발전된 형태, 즉 자동차의 내비게이션, 비행기 좌석 앞 모니터로 실시간 볼 수 있는 항로, 각종 길 찾기 앱, 해왕성에 근접해서 이 별의 얼굴을 촬영하고 미지의 어둠 속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는 보이저 2호의 항로 같은 이미지들을 특질로 간직한 시대에 살고 있다. 풍수지리의 이미지로부터 저 첨단의 이미지들에 이르기까지, 지리학과 더불어 인류의 경험은 부단히 확장되고 있다.

철학은 흔히 논리적 사고를 이용해 관념들을 꼭 맞는 퍼즐처럼 배열하는 일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관념들은 ‘필연적인’ 논리적 법칙의 끈으로 서로 단단히 동여매진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논리적으로 연결된 ‘관념들’ 속에만 자리하지 않는다. 손과 발, 온몸으로 체험하는 지구상의 ‘경험들’이 삶을 채운다. 그리고 경험의 경이(驚異)는 지리상의 새로운 발견을 기록하는 학문, 지리학이 지킨다.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의 정교한 ‘지도’를 떠올려 보라. 게임 속에서마저도, 산다는 것,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 배운다는 것은 ‘지리’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그런데 관념의 학문인 철학과 경험의 학문인 지리학은 정말 먼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 상관없는 학문들로만 머물 것인가? 그렇지 않다. 철학에는 경험주의 정신이라는 문이 있다. 지리학은 이 문을 통해서 철학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그리하여 현대의 어떤 철학적 경향은 지리학을 통해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려 하며, 지리학을 통해 스스로 변모되려 한다. ‘지리학으로 철학하기’가 가능한 것이다.

철학은 언제부터 지리학에 대해 주목할 만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우리는 이를 18세기의 관념론 철학자 칸트에게서 발견한다. 칸트는 자신의 고향 땅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 바깥으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세계 지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대학에서 지리학 강의까지 개설했다. 젊은이들이 경험적 지식을 쌓지 않고, 정교하게 논증하는 철학의 작업에만 몰두하는 것은 그들에게 큰 손실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경험적 지식을 대표하는 것이란 바로 지구의 역사를 담은 지리학이었다.

우리는 칸트의 ‘1765∼1766 겨울학기 강의 개설 공고’(강병호 역)에서 지리학 강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읽을 수 있다. “모든 국가와 바다 사이의 자연적 관계와 이것들이 연결되는 이유를 포함하는 이 부분은 모든 역사의 진정한 토대이다. 이 토대가 없는 역사는 동화 이야기와 거의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칸트는 지리학 강의의 주제를 세 가지로 소개한다. 첫째 국가들의 교역과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진기한 자연환경, 둘째 다양한 인간들의 자연적 특성과 도덕적 특성, 셋째 지정학적 위치, 인구 등의 관점에서 살펴본 국가이다. 즉 자연, 인간, 국가라는 세 가지 층위가 칸트 지리학 강의를 이루는데, 위 인용은 그 가운데 자연과 관련된 문장이다. 헤겔 같은 철학자는 정신 또는 이성이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 글에서 칸트는 흥미롭게도 바다와 같은 지리적 조건이 역사의 진정한 토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성이 주관하는 역사와 지리가 주관하는 역사는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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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을 살피기에 앞서 잠깐 미셸 푸코의 연구를 보자. 푸코 역시 자신이 수행하는 철학적 작업을 지리학과 연관 짓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진보적인 지리학자들이 1970년대 중반에 만든 학술지 ‘헤로도토스’와의 대담 ‘지리학에 관해 푸코에게 보내는 질문’(이상길 역)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착, 분포, 분할, 영토의 통제, 권역의 조직을 통해 전개되는 전략과 전술들은 일종의 지정학을 구성할 수 있는데, 바로 거기서 제 관심사가 여러분(지리학자들)의 방법에 합류하겠지요.…지리학이 제 관심사의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어 푸코는 “지식과 조직의 모태로서 군대”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했다. 어떻게 군대와 같은 조직이 지식의 형성에 개입하는지를 밝히는 연구 말이다. 이러한 연구에는 당연히 부대의 기동, 식민지, 영토 등과 같은 지리적 요소를 탐색하는 작업이 따를 수밖에 없다. 지리가 지식 일반의 형성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앞서 칸트가 말하듯 역사의 형성에 역시 지리가 개입한다. 또는 지리학이 역사학을 대체한다. 이 점을 우리는 철학자 들뢰즈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들뢰즈는 ‘지리철학(geophilosophie)’이라는 이름 아래 지리학을 철학의 땅으로 적극 끌어들이고 있는 사람인데, 특히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시작된 이유’를 설명할 때 그렇다. 그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이정임 외 역)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는 반도의 각 지점이 바다에 인접해 있고 해안들의 길이가 상당해서 일종의 분열 가능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그것은 동방의 경계에 접해 있는 일종의 ‘국제적 장터’ 같다.…그곳에서 장인들과 상인들은 제국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던 자유와 이동 가능성을 구가하게 된다.…장인과 상인들뿐만 아니라 철학자들 역시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여기서 “동방” 또는 “제국”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그리스에 인접해 있는 페르시아 제국을 가리킨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이 제국의 경계에 자리 잡은 ‘국제적 장터’ 같은 것이었다. 이 장터는 제국의 문물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제국에 충분히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제국에 흡수되어 버리지는 않았다. 바로 “분열 가능한 구조”를 지닌 그리스의 지리 때문이다. 그리스는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고 에게해는 수많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동방의 제국이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복속시키려 한다면, 이 도시 국가들은 언제든 바다를 통해 제국의 손아귀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국가들은 길고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분산’되어 있기에 제국의 포위망 안으로 쉽게 들어서는 대신 바다로 용이하게 피신한다. 일단 바다로 나가면 수많은 작은 섬들이 항해자의 시계(視界)에서 사라지지 않기에 설령 좋지 못한 항해술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에게해는 ‘오뒷세이아’의 괴물들이 사람들에게 오싹한 즐거움을 주는 그리스인들의 물놀이 테마파크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자유를 잃지 않고 제국과 문물을 거래하는 상인들로 남을 수 있었다. 이 상인들의 도시 국가가 철학자들을 잉태할 준비를 한다. 제국의 신민은 제왕에게 복종하고 공물을 바치거나 하사품을 받지만, 상인들은 자유인으로서 또 다른 자유인과 거래를 할 뿐이다. 철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성은 제왕에게 복종하는 법이 없고, 늘 자유롭게 또 다른 자유로운 이성과 논쟁할 뿐이다. 복종도 지배도 거부하는 이 자유로운 이성들 사이의 논쟁을 그린 장대한 벽화가 바로 그리스 철학의 기록물인 플라톤의 대화록인 것이다.

이렇게 철학의 형성에는 지리가 개입하며, 철학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지리학이다. 헤겔은 (철학사를 포함하는) 인간의 역사를 이성의 필연적인 자기 전개 과정으로 여겼다. 그는 ‘정신현상학’(임석진 역)에서 말한다. “이성은 또한 합목적적인 행위라고 할 수도 있다.…결과가 시초와 동일해지는 것은 시초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최종적인 결과에 이르도록 현실화시키려는 목적에 따라 자신을 전개한다. 이 전개 과정이 세계사이다. 이것은 이성의 역사이기에 이성의 관념들이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되듯 “과정상의 각 계기는 모두 필수적이다.” 이런 이성의 역사는, 지리와 같은 경험적 조건이 실제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바로 그런 실제 역사에 대한 앎을 주는 것이 지리학이다. 지리학은 철학이 추상적인 관념의 풍선을 붙잡고 하늘로 오르려 할 때 그 두 발을 붙잡아 땅 위에 굳건히 서게 한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글에서 언급된 주요 저작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독일관념론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들 가운데 하나. 많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면서 고대에서 헤겔 당대에 이르는 역사를 이성의 필연적 법칙인 변증법에 입각해 서술했다. 들뢰즈가 그의 학문적 동지인 가타리와 함께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철학과 그에 인접한 과학·논리학·예술 등을 독특한 관점에서 분석한 책. 헤겔의 경우와 반대로 역사를 지배하는 이성의 법칙은 부정하며, 한 사건을 만드는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요인을 부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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