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징병 안 돼 태어난 하루키 “존재란 우연이고 빗방울일 뿐” 전후일본 정의한 오구라 기조
“전후일본은 喪中 세월이었다” 일제 치하와 6·25 겪은 우리 친일척결·멸공 외 애도해 봤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짧은 에세이에, 1917년생인 그의 아버지가 제국일본의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교토대 입학이 내정되었다는 이유로 징병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승려가 될 사람이었던 아버지가 그렇게 제외된 덕분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니 존재란 그저 우연이고 한 방울의 빗방울일 뿐이라는.
그리고 아버지가 난징(南京)학살로 악명 높은 16사단 20연대에 배치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미뤘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배치됐던 16사단 전체가 후에 필리핀에 배치되어 대부분 궤멸당하는 참혹한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아버지가 징병 해제되지 않았다면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버지는 중국인 참수에 대해 말한 적이 있고, 아침마다 마음을 다해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 불경을 소리 내어 읽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쓴 자신에 대한 에세이다.
무라카미는 그 사건이 “군인이자 승려였던 그의 영혼에 묵직한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지나가듯 그 얘기를 들려준 건 자신에게 전하고 싶어서였을 거라고. 이어서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역사도 마찬가지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고 쓴다.
교토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교수 역시 전후일본이 ‘애도’하며 살아왔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상중(喪中)”인 세월을 지내왔다고. 아마도 이런 이야기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낯설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 붕괴 후 이른바 일본의 ‘전후’에 대해서는 정보가 충분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작가 무라카미와 오구라 교수의 독백 같은 이야기는, 전후일본의 핵심을 꿰뚫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일본에 비해, 내전으로 인해 백만 명 넘는 사람이 죽고 수백만 명이 부상을 당했던 우리는 그런 과거에 대해 제대로 애도한 적이 없는 것 아닐까. 애도란, 과거가 된 죽음들을 이해해가는 과정일 터인데, 그저 분노의 대상으로 삼거나(멸공!) 그런 분노에 대한 또 다른 분노(친일파 척결!)만이 횡행하는 현실을 보기에 그렇다.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하나의 원인으로만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역사 역시 수많은 복합적인 요소로 이루어지는데도, 우리는 곧잘 ‘가장 큰’ 원인을 찾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크게 보이는’ 원인을 어느새 유일무이한 원인으로 여기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와는 다른 요소를 보는 건 그저 작은 것이거나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아예 (굴욕적인) ‘식민지 시대는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진 건 그 결과 아닐까 싶다.
일제시대란, 말하자면 강제 결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태어났고 그런 이상 그 공간의 경제와 문화와 교육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거기에 ‘오욕’과 함께 존재했던 수많은 일상에 대해 그 갈래 갈래를 하나씩 펼쳐 보면서 ‘이해’하는 것 말고 도대체 어떤 ‘역사의식’이 가능할까.
해방 이후 한국은 한 번도 그 오욕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다. 대신 깨부숴버리거나 미처 깨부수지 못한 것들은 망각의 저편으로 보내졌다.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나온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1990년대 김영삼의 구호는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상징적이다. 총독부 ‘파괴’는 그 정점이었고, 이후 많은 인식이 변했고 잊혔다.
부인과 망각으로 이뤄진 자기 인식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역사를 ‘응징’이나 ‘처벌’ 또는 자기 긍지의 회복을 위한 뭔가로만 생각하는 건 역사를 ‘개인’의 다층적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적 기억’은 대개 그런 맥락들이 소거되면서 성립한다. ‘처벌’이란, 역사와 마주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알게 되면 이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타자와도 대화가 가능해진다. 그 타자를 알게 되면서 그가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저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가해자에게도 가해자로서의 고통이 있다는 것도.
가해자의 고통이 목소리가 되려면 제대로 들으려는 청자(공동체)가 필요하다. 우리는 무라카미 등의 고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듣는다는 것은 물론 응답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제시대 때 피해 기억을 가진 이들의 후손이기도 하지만, 같은 일제의 가해에 참여(당)했던 이들의 후손이기도 하다. 무라카미의 아버지가 본 참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조선인일 수 있었다.
패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병사는 300만 명 이상이었다. 쫓겨 돌아온 민간인을 합치면 700만 명 가까운 숫자였다. 당시 인구의 10분의 1이 각각 다른 형태의 가해와 피해를 체험했다. 그런 그들이 이후 어떻게 보냈는지가, 전후일본을 아는 또 하나의 열쇠이기도 하다.
무라카미는 말한다. 존재감 없는 한 방울일지언정 “계승해 나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고. 그 한 방울이 어딘가로 스며들어 버려 설사 보이지 않는다 해도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