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욱 고려대 교수,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필자가 공부했던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의 닉네임은 ‘쇼우미 스테이트(Show Me State)’이다. 서부개척 시대에 미시시피강을 건너려는 이들에게 뱃사공이 배를 타기 전에 돈을 먼저 보여 달라고 말해서라는 속설이 있다. 또, 백인들이 인디언들과 거래할 때 자주 물건을 속이자 인디언들이 먼저 물건을 보여 줘야 거래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이 닉네임을 거론한 것은 북한 김정은의 전격적인 핵시설 공개가 물건을 보여주고 진짜 거래를 하겠다는 행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미 대선 후보 TV토론의 시청자 중에는 평양의 김정은 지도부도 있다. 누구보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기대하며 토론을 시청했겠지만 실망이 컸을 것이다. 북핵(北核)이 토론의 주제가 되지 못했고, 특히 카멀라 해리스 후보가 자신을 비하하는 상황에서 김정은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김정은은 13일 평양 의사당 서쪽의 강선 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핵무기연구소와 무기급 우라늄 농축기지를 둘러보면서 ‘기하급수적인’ 핵무기 생산을 촉구했다. 잘 정비된 공장에 수천 개의 고농축우라늄(HEU) 생산용 원심분리기가 진열된 모습은 북핵이 인공지능(AI)에 의한 딥페이크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임을 생생히 보여준다.

지난 2004년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압두르 칸 박사가 우라늄 원심분리기 기술의 설계도와 부품을 전해줬으나, 미 중앙정보국(CIA) 등 서방 정보 당국은 현물 추적에 실패했다. 기존 영변의 핵 시설이 단순 철강 제조시설이라면 강선은 첨단 반도체 공장 수준으로, 규모와 장치가 발전된 모습이었다. 김정은이 “보기만 해도 힘이 난다”고 할 정도이니 대량생산 체계를 갖춘 듯하다. 강선 원심분리기는 2m 크기의 파키스탄 모델보다 다소 작아 개량형으로 추정된다. 연간 10여 개의 핵폭탄 제조가 가능해 소형화·경량화에 성공한 것이다. 기존 50개의 핵무기에다 표준화된 방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생산할 경우 북한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5개 공식 핵무기 보유국 다음으로 핵무기를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될 것이다.

김정은이 특급 비밀인 시설 내부를 전격 공개한 것은, 미 대선을 앞두고 핵무력을 과시해 차후 대미 협상 과정에서 몸값을 올리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 진의가 무엇이든 가상으로만 존재하던 핵무기가 땅으로 내려왔다. 남은 미 대선 기간 7차 핵실험 등 각종 도발 이벤트를 살라미 전술로 구사할 것이다.

핵 빅 이벤트를 전개한 김정은은 13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전 국방장관)를 접견하고 전략적동반자로 협력을 확대해 나갈 것을 확인했다. 첨단 우주항공 기술을 가진 러시아의 지원으로 북핵 위협은 글로벌 차원으로 확대될 것이다. 내년으로 예상되는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은 북핵의 새 전선이 형성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핵 시설을 공개한 지 닷새 만인 18일 평남 개천 일대에서 단거리탄도미사일(SRBM)을 쏘아댄 북한이다. 이제 북한의 핵 능력을 있는 그대로 평가해야 한다. 실물을 봤으니 북핵 위협에 대한 여야 정치권의 초당적이고 객관적인 합의가 중요하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응책이 마련된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현물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면 답은 없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남성욱 고려대 교수,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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